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1743년과 1744년의 전황

정준극 2018. 6. 18. 17:08

1743년과 1744년의 전황


1743년은 새로 신성로마황제가 된 샤를르 7세의 군이 참패를 당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군과 바바리아군은 서로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브로글리 원수를 바바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연합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바바리아의 지휘관들은 '자기가 무언데'라면서 브로글리를 업수이 여겼고 브로글리는 '그래 해 볼테면 해 보자'면서 바바리아 지휘관들을 무시하였다. 바바리아 지휘관들과 브로글리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바바리아군은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제켄도르프 원수가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당연히 프랑스의 브로글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두 사람은 심심하면 언쟁을 벌였다. 그러는 한편, 동맹군의 샤를르 공자는 잘츠부르크로부터 도나우를 따라 남쪽이로 진군하였고 케벤휠러 장군은 잘츠부르크로부터 바바리아의 남쪽으로, 그리고 보헤미아의 로브코비츠 공자는 나아브(Naab)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바바리아군은 1743년 5월 브라우나우 인근의 짐바흐에서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단한 고통을 당했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의 짐바흐


이제 영국군의 근황을 살펴보자. 영국운은 조지 2세 국왕이 직접 이끌었다. 조지 2세라고 하면 헨델이 봉사하던 왕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헨델은 조지 2세를 위해 '왕궁의 불꽃놀이'와 '수상음악'을 작곡했다. 영국군은 '국사군'(Progmatic Army)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영국은 1713년 샤를르 6세가 선포한 '국사조치'(Progmatic Sanction)를 지지하는 국가로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의 편에 서서 지원했기 때문이다. 조지 2세가 이끄는 영국군은 마인강까지 진군하였다. 이에 대적하기 위해 프랑스군이 라인 중간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노에이유 장군이 이끌었다. 노에이유 장군은 영국군을 함정에 빠트려서 타격을 줄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의 군대가 이런 작전을 간파하고 기습을 하는 바람에 노에이유 장군의 부대는 그나마 견뎌냈지만 바바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브로글리 원수의 군대는 타격을 받아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실제로 바바리아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곳들이 하나둘씩 샤를르 공자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노에이유 장군은 시태전환을 위해서 데팅겐에서 영국군을 포위하고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휘하의 그라몽 공작이 무슨 생각을 했던지 느닷없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국사군, 즉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결과는 프랑스군의 참패였다. 프랑스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채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치열했던 데팅겐 전투. 1743년


프러시아의 프레데릭(프리드리히) 왕은 데팅겐에서 프랑스군의 패배에 적지 아니한 충격을 받았다. 프레데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것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다른 동맹을 구해야 했다. 프레데릭은 라이발인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를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걱정이었다. 그러다가 프러시아에 대적하는 동맹군들도 따지고 보면 별로 강력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영국군들은 승전의 고삐를 더 당길수 있는 기회가 몇번이나 있었지만 딴 생각들을 하는지 그런 기회를 놓친 것을 보고 '별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러시아에서 뜻밖의 사건이 생겼다. 짜리나 엘리사베스를 몰아내고 대신 어린 이반 6세를 짜르로,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안나 레오폴도브나 대공녀를 섭정으로 앉히려는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었던 것이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러시아에서의 음모에 러시아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인 안토니오토 보타가 깊숙히 관여되었다는 것이었다. 보타 대사가 얼마니 깊숙히 관여했냐하면 러시아의 쿠테타 기도를 '보타 음모'(Botta Conspiracy)라고까지 부르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은  러시아와 동맹국이던 오스트리아에게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보타 음모'는 오스트리아 정부에만 악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작소니와 영국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었다. 프레데릭으로서는 '보타 음모'에 따른 반사적 이익을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는 러시아와의 평화조약을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당시의 유럽 지도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브로길 원수는 이제 나이도 많고 기력도 쇠잔하여서 코이니 원수로 대체되었다. 프랑스군은 라인의 아랫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독일에는 프랑스군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틈을 이용하여 샤를르 공자와 조지 2세는 전열을 가다듬어서 새로운 공세를 시도코자 했다. 1차적으로 영국과 로레인 연합군은 봄스(Worms)를 점거하고 기세를 올렸다. 전쟁이 진행되면 동맹국과 연합국의 이산집합은 언제나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 영국, 더치 공화국 그리고 사르디니아가 동맹국으로 모습을 보였다. 작소니는 이번에는 편을 바꾸었고 스웨덴이 러시아 대신 등장하였다. 그래서인지 스웨덴과 러시아는 상호간 중립을 지키기로 했다. 1743년의 오보 평화조약(Peace of Åbo)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은 계속 침묵만 지켰다. 프러시아가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항하지 않아도 프랑스, 스페인, 바바리아가 활발하게 대작하고 있기 때문에 잠자코 있어도 무관했다. 하기야 1743년의 여름은 데팅겐 전투와 '보타 음모'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봄스에서는 영국, 오스트리아, 사르디니아가 비밀스런 회동을 하며 협상을 진척시키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침묵만 지키고 있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이 금명간에 오스트리아를 재침공할 것 같아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사르디니아와 별도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했다. 그해 9월에 '봄스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 마지오레 호수와 티치노 강의 서쪽에 있는 지역들을 모두 사르디니아에 양도하기로 했다. 포강의 남쪽에 있는 얼마 안되는 영토도 사르디니아에 양보하기로 했다. 반면에 사르디니아는 밀라노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며 또한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를 보장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싸우는 오스트리아를 위해서 4만명의 병력을 제공키로 합의했다.


봄스(Worms). 라인강의 니벨룽 다리와 멀리 보이는 봄스 대성당


제2차 실레지아 전쟁은 1744년에 시작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가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은 것이 성공적인 것을 보고 오랜 침묵을 깼다. 프레데릭은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비밀리에 또 다른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사실상 지금까지 바바리아의 깃발 아래에서 영국과의 교전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프러시아와 1744년 4월에 새로운 협정을 맺고 오스트리아 및 사르디니아와도 직접적인 전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프랑스는 양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영국을 상대로 총공격을 감행하여 유럽 본토에서 영국군을 섬나라로 돌려보내는 작전을 펼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를 공격한다는 양동작전이었다. 프랑스는 마치 영국 본토를 공격할 것처럼 던커크에 군대를 집합시켰다.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는 차기 영국 왕위를 주장하는 제임스 에드워드 스투어트의 아들이었다. 제임스 에드워드 스투어트는 제임스 2세의 아들이다. 제임스 2세는 마지막 가톨릭 왕이었으며 마지막 스투어트 왕이다. 제임스 2세는 1688년에 딸 메리와 그의 개신교 남편인 오렌지 공 윌리엄을 위해 영국왕에서 물러났었다. 하지만 대다수 영국 국민들은 스투어트 왕조가 영국의 군주로서 되돌아 오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스투어트 왕조를 적극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1715년에 스코틀랜드에서의 봉기를 지원하였다. 스코틀랜드의 봉기에는 왕위를 주장하는 제임스 2세도 동참한바 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봉기는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에 돌아오는 것을 금지했다. 제임스는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야 했다. 교황 클레멘트 11세가 제임스에게 바티칸 소유의 팔라쪼 무티에 와서 지내도록 편의를 보아주었다.


사르디니아 섬의 해안. 중세의 향취가 머문 곳이다. 1720년에 사보이 공국이 이 섬을 얻고 사르데냐 왕국이 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은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전신이다. 칼리아리는 사스데니아의 수도이다.


샤를르는 그의 아버지보다 더 카리스마가 많았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스코틀랜드가 또 다시 봉기를 일으킬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루이 15세는 발랄디의 드뤼몽을 로마에 있는 스투어트 궁에 사절로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샤를르에게 던커크에 와서 준비하라고 요청했다. 1744년 1월에 던커크에서 영국으로 출범하는 함대를 조직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그런 전갈을 가지고 떠난 발랄디가 너무 늦게 로마에 도착하였다. 샤를르로서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 샤를르의 아버지가 1743년 12월 23일에 샤를르를 섭정왕자로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샤를르는 누구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독단적인 행동을 할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1744년 봄에, 샤를르는 비밀리에 프랑스에 도착하여 영국에 진입할 함선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출범키로 되어 있는 날의 전날 밤에 던커크 일대에 극심한 폭풍이 몰아쳤다. 이 폭풍을 '개신교 바람'(Protestant Wind)이라고 불렀다. 그 바람에 항구에 대기하고 있던 대부분의 함선들이 파손되거나 침몰했다. 영국을 침공하려던 샤를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영국에 스투어트 왕조를 부흥시키려는 샤를르의 희망은 꺽이지 않았다.


프랑스는 기회만 있으면 영국 섬에 진출하여 세력을 장악코자했다. 당연히 두 나라 해군간의 해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규모가 큰 해전은 1744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장소는 프랑스 동남부 지중해에 면한 툴롱(Toulon)의 앞바다였다. 토마스 매튜 제독이 지휘하는 대규모의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해안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해군이 영국 함대에 돌격하여 비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손해를 입혔다. 영국 함대는 갑작스런 공격을 받아 함선들 몇 척이 파손되자 수리를 위해 잠시 후퇴하였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 해안에 대한 영국 함대의 봉쇄는 자연적으로 풀어졌다. 이제 막강의 스페인 함대는 지중해를 콘트롤 할수 있게 되었다. 며칠후에 스페인의 전함 몇 척이 툴롱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들어갔다. 멀리서 영국 함대가 그 모습을 예의주시하였다. 다음날 스페인 함대와 프랑스 함대가 항구에서 나와 바다로 항해하였다. 영국의 매튜 제독은 대기하고 있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다고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툴롱 해전'이었다. 그런데 매튜 제독의 영국 함대는 시작은 그럴듯했지만 점차 전투가 진행될수록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매튜 제독과 부제독인 레스토크간에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레스토크 부제독이 일부러 반란을 일으켜서 전투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튼 스페인 함대는 영국의 저지선을 무사히 뚫고 지중해로 탈출할수 있었다. 영국 함대는 동북쪽으로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ㅣ


스페인-프랑스 연합함대와 영국함대간의 툴롱 해전. 1744년 2월


기술적으로 보면 툴롱 해전은 영국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가 지브랄타르 해협을 봉쇄한다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스페인과 프랑스가 연합하여서 영국 본토를 침공한다면 더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매튜 제독이 지중해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함대들을 놓아 준것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는 중에도 영국에서는 매튜 제독과 부제독인 레스토크에 대한 군사재판이 진행되었다.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기 위한 것이었다. 레스토크는 무죄가 선언되었고 매튜 제독은 유죄로 판결되었다. 판결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해서 난리도 아니었지만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가 없었다. 한편, 북유럽의 전쟁터는 어떠한가?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스스로 용기백배하여 9만 병력을 휘하에 두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하였다. 루이 15세는 1744년 7월에 메닌(Menin)과 이프레스(Ypres)를 점령하였다. 루이 15세는 프랑스의 이런 침공에 대하여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루이 15세는 러시아는 빠졌다고 치더라도 전에 영국의 조지 2세가 총지휘를 맡았더나 영국군, 더치군, 하노버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기는 했다.


벨기에의 이프레


프랑스는 전병력을 네 파트로 나누에 전선에 배치했다. 코이니(Coigny) 원수는 5만 7천 병력으로 라인강을 바라보는 곳에 배치했다. 샤를르 공자가 지휘하는 연합군 병력 7만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전투 경험이 없는 신병 3만은 콘티(Conti) 공자의 지휘아래 뫼스(Meuse)와 모젤(Moselle) 강 사이에 배치하였다. 이 병력은 나중에 이탈리아 북부의 피에드몽과 롬바르디에 진을 치고 있는 스페인 병력을 지원하는 예비병력으로 두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샤를르 공자의 선취 작전으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명장 트라운 원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샤를르 공자는 1744년 7월 초에 병력을 필립스부르크 인근의 라인 일대에 은밀하고도 신속하게 배치하였다. 결과, 코이니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 병력을 알자스로부터 격리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프랑스군의 세번째 배치는 다르쿠르 공작이 지휘하는 1만 7천 병력으로 룩셈부르크 일대에 포진하는 것이었다. 네번째 배치는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플란더스군 8만 7천으로 구성된 병력을 전진배치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이러한 대규모 병력 배치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하였는데 숫적으로는 방어병력보다 크게 열세여서 걱정이기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서 더치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루이 15세의 지휘를 받는 플란더스군이 신속하게 네덜란드를 횡단하여 더치군의 후방을 치자 더치군은 말할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더치군은 프랑스의 루이 15세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평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더치의 평화제안을 거부하였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했듯이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7만 병력이 1744년 6월 말에 라인강을 성공적으로 건너서 코이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허리를 차단하는 바람에 승승장구하던 프랑스군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코이니 군대는 적진을 뚫고서 봐이센부르크에서 스트라스부르로 퇴각해야 했다. 또한 루이 15세는 네덜란드 남부를 침공했던 것을 포기하고 알자스와 로레인에서 방어하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1744년 7월 중순, 프러시아의 프데레릭 왕은 샤를르 공자가 라인 건너편에 있던 프러시아군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샤를르 공자의 군대는 프랑스에 들어가 있는 프러시아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샤를르 공자의 이같은 행보는 그가 동부전선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프레데릭은 1744년 8월에 오스트리아 전선을 통과하여 보헤미아로 진격하였고 며칠 후에는 프러시아의 8만 대군이 보헤미아에 진입할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무얼 하고 있었는가? 실레지아에만 모든 신경을 다 쓰고 있었다. 권토중래하여 실레지아를 탈환코자 하는 준비에만 진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도 그랬고 휘하의 참모들도 프레데릭이 그렇게 전광석화처럼 보헤미아로 진격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상 프레데릭은 군대를 세 파트로 나누어서 보헤미아로 진격하였다. 첫번째 부대는 4만 병력으로 프레데릭 자신이 지휘하여 작소니를 거쳐서 보헤미아로 향하였다. 두번째 부대는 젊은 데사우어가 이끄는 1만 6천 병력으로 루사티아를 거쳐 보헤미아로 향하였다. 세번째 부대는 역시 1만 6천 병력으로 슈베린 백작의 지휘 아래 실레지아로부터 벗어나서 보헤미아로 향하였다. 세 부대의 최종 목표는 프라하였다. 세부대 모두 9월 2일까지는 프라하에 도착하는 것으로 예정을 잡았다. 프라하는 포위되고 공격을 받았다. 6일 후에 프라하의 오스트리아 수비대는 하는수 없이 항복하였다. 프레데릭은 프라하에 일부 프러시아 병력만 남겨두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급히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그리하여 타보르, 부드봐이스, 프라우엔버그를 차례로 장악하였다.


오늘날의 프라하


마리아 테레지아는 비엔나도 프레데릭의 위협 아래에 있을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급히 헝가리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비엔나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외교력을 발휘하여 작소니를 오스트리아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것은 프러시아에 커다란 타격이었다. 이와 함께 알사스에 있던 샤를르 공자는 보헤미아가 프레데릭의 손에 떨어졌다는 급보를 접하자 즉시 군대를 움직여서 라인을 건너서 프러시아를 후방에서 공격키로 했다. 그렇게 샤를르 공자의 군대가 이동을 하게 되자 프랑스가 가만히 있을수 없어서 샤를르 공자의 군대가 라인을 건너느라고 혼잡 중에 있을 때에 급습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왜 그러는지 모르는데 하여튼 지휘관이 문제가 있어서 무얼 어떻게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였다. 샤를르 공자의 군대는 별다른 손해를 입지않고 라인을 건넜다. 프랑스군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총사령관인 루이 15세가 메츠에서 성홍열에 걸려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이 15세의 병세는 실로 위중하여서 일부는 장례준비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프랑스군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프레데릭은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와 작소니 연합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라인에 주둔하고 있던 트라운 백작이 급히 불려와서 보헤미아에서 프러시아군을 축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헝가리의 비정규군도 여러 방면에서 프러시아군을 괴롭혔다. 마침내 샤를르 공자의 군대가 프러시아와 대치하고 있는 동부전선에 도착하였다. 프레데릭은 샤를르 공자와 트라운 백작의 군대의 양면 공격을 받아 커다란 타격을 받고 프라하로부터 퇴각하여 실레지아로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실레지아에서 어떠한 거점도 장악하지 못했다. 한편, 라인에서는 루이 15세가 병에서 회복하여 프라이부르크를 포위공격하였고 마침내 점령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15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