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비엔나와 베토벤

정준극 2018. 2. 16. 21:51

비엔나와 베토벤

비엔나에 있는 베토벤 기념명판 총정리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10년을 살았지만 베토벤은 35년을 살았다. 생애의 3분의 2를 산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비엔나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엔나에는 베토벤이 살았던 집을 기념하기 위해 명판을 설치해 놓은 곳이 20군데가 있다. 그중에서 한군데는 최근에 건물을 개축하는 바람에 베토벤이 살았었다는 내용의 명판이 철거되었다.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살면서 비엔나 교외를 포함해서 약 60군데를 전전하면서 지냈다. 베토벤은 뫼들링과 하일리겐슈타트 쪽에서 여러번 지냈는데 당시에 그 지역들은 비엔나의 교외였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살았던 것은 아마 경제적으로 집을 사서 지낼 형편이 아니어서 셋방을 전전했기 때문인 것같다는 얘기다. 아무리 전세로 살았다고 해도 위대한 베토벤이 거주했던 장소이므로 모든 집에 기념명판을 붙여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런 집들이 철거되거나 전쟁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오늘날 기록만 남아 있고 실제 건물은 볼수 없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그래도 비엔나에서 베토벤과 인연이 있는 곳이 아직 20여곳이나 남아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런 장소들은 비단 베토벤 추종자들 뿐만이 아니라 일반 음악애호가들도 순례해야 하는 곳들이다. 이제 악성 베토벤의 비엔나에서의 발자취를 순례자의 심정으로 찾아가 본다.


베토벤과 라수모프스키 현악4중주. 3구 란트슈트라쎄의 라수모프스키가쎄에 있는 팔레 라수모프스키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베토벤은 1814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1세가 주최하는 송구영신 파티에 초청을 받았으나 이날 초청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팔레 라수모브스키에서의 무도회가 끝나고 불이 나서 귀중한 미술작품들이 상당수 소실되었다. 


베토벤은 1792년 11월에 비엔나에 정착하기 위해 도착하였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년 쯤 후였다. 사실 베토벤은 그 전에 한번 비엔나에 온 일이 있다. 1786년, 그가 16세 때였다. 당시에 본의 선제후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 아들인 막시밀리안 프란시스였다. 베토벤은 선제후의 지원을 받아 음악공부를 더 하기 위해 비엔나에 왔던 것이다. 베토벤이 그때 비엔나에서 모차르트를 만났는지의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에피스도르는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만났으며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솜씨를 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 청년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위대한 음악가가 될 사람입니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고 한다. 비엔나에 온 베토벤은 모차르트를 비롯해서 스승이 될 사람을 이리저리 찾아보고 있던 중에 본으로부터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베토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즉시 본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베토벤은 비엔나에 처음 와서 한달도 못되게 지냈는데 그때 어디서 지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모른다. 베토벤이 비엔나에서 본으로 돌아가고 나서 얼마후에 베토벤의 어머니는 결국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 더 심해져서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관심도 없었다. 베토벤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주선해야 했고 결국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지지 않을수 없었다. 베토벤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막시밀리안 선제후는 베토벤의 아버지가 받을수 있는 연금의 반을 베토벤이 받을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것으로 술꾼 아버지와 두 동생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수 있었다. 베토벤은 다시금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가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막시밀리안 선제후가 이번에도 베토벤을 지원해 주었다. 베토벤은 1792년 11월에 비엔나에 도착했고 하이든을 만나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베토벤은 비엔나에 35년 동안 살았다. 그 35년간의 발자취 중에서 중요한 곳만 추적해 본다. 


모차르트를 방문해서 피아노를 연주해 보이고 있는 청년 베토벤. 돔가쎄 5번지에서라고 추정되고 있다.


○ 1구 힘멜포르트가쎄(Himmelpfortgasse) 6번지: 이 집은 베토벤이 살았던 집이 아니다. 베토벤이 비엔나에 정착한 후에 그가 자기의 작품을 연주하였던 곳으로 그에 대한 기념명판이 붙어 있어서 소개하는 것이다. 이 집은 사실 식당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요리장이었던 프란츠 얀이라는 사람이 문을 연 고급식당이었다. 그런데 프란츠 얀은 음악을 매우 좋아해서 식당에서 작은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모차르트도 이 식당연주회장에서 헨델의 파스토랄레의 연주를 지휘했다. 그리고 1797년에는 베토벤이 이 식당에서 네개의 금관악기와 피아노를 위한 5중주곡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내용이 명판에 적혀 있다. 오늘날 그 식당은 카페 프라우엔후버(Cafe Frauenhuber)이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이 식당에서 지휘도 하고 피아노 연주도 했다는 내용의 명판

힘멜포르트가쎄 6번지는 현재 카페 프라우엔후버이다.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기념명판이 있다.


○ 19구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 베토벤은 이 집에서 1802년 여름과 가을을 보내면서 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Heiligenstädter Testament)를 썼다. 이 서한은 동생 칼과 요한에게 보내는 것이지만 보내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자기의 청각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고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유서를 써놓았다고 한다. 그런 내용의 명판이 이 집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날 이 집은 베토벤기념관이다. 이 집에는 1921년에 비엔나 남성합창연맹(M.G.V)가 설치해 놓은 명판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집을 보수하면서 철거되었다. 그 내용은 Ludwig van Beethoven verfasste in diesem Hause am 6. Oktober 1802 das Heiligenstädter Testament. Im Oktober 1921 M.G.V(Männergesangverein)이다.


19구 프로부스가쎄 6번지의 표지판. 비엔나시가 역사적 기념물로 선정하여 설치한 안내판이다. 베토벤하우스는 18세기 중반에 건설되었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의 프로부스가쎄 6번지. 암브루스터가쎄 방향.


○ 4구 밀뢰커가쎄(Millöckergasse) 1번지. 테아터 안 데어 빈(빈강변극장)이다. 베토벤은 이 극장의 한쪽 방에서 1803년부터 1804년까지 살면서 오페라 '휘델리오', 교향곡 3번, 크로이처 소나타 등의 작곡에 열중했다. 그러한 내용의 명판이 밀뢰커가쎄에 면한 테아터 안 데어 빈의 구정문 옆 벽면에 붙어 있다. 구정문 앞에는 베토벤호텔이 있다. 베토벤이 살았던 집은 아니며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베토벤이 지냈기 때문에, 그리고 '휘델리오'를 비롯한 베토벤의 여러 작품들이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기 때문에 그같은 사실을 기념해서 호텔 이름을 베토벤이라고 붙인 것이다. 베토벤이 테아터 안 데어 빈에 기숙할수 있었던 것은 모차르트의 친구로서 배우, 극작가, 성악가, 임프레사리오인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주선에 의해서였다. 쉬카네더는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주인이었다.


밀뢰커가쎄 1번지, 테아터 안 데어 빈의 구정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명판. Ludwig van Beethoven wohnte im Theater an der Wien 1803 und 1804. Teile seine Oper / Der dritten Symphonie und der Kreutzersonate sind hier entstanden. Fidelio und andere Werke erlebten in diesem Haus ihre Uraufführung. 이라고 적혀 있다.

밀뢰커가쎄 1번지 테아터 안 데어 빈 구정문(왼편).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기념명판이 있다. 오른편에 호텔 베토벤이 있다. 필자가 1970년대 말에 비엔나에 처음 갔을 때 묵었던 호텔이다.


○ 19구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Döblinger Hauptstrasse) 92번지. 베토벤은 1803년 여름에 이 집에서 지내면서 주로 '에로이카'(교향곡 3번)를 작곡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이 집을 '에로이카 하우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훗날 미국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던 음악학자인 알렉산더 휠로크 테이어(Alexander Wheelock Thayer: 1817-1897)는 베토벤이 '에로이카'의 상당부분을 완성한 되블링의 집은 호프차일레(Hofzeile) 15번지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에 90번지 이상의 숫자가 도입된 것은 1802년이 아니라 1804년이기 때문에 1803년에 92번지가 있었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호프차일레 길은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이 집은 전형적인 비엔나 교외의 모습이다. 장방형이고 그 가운데에 뜰(호프)이 있는 집이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나폴레옹에게 헌정코자 했던 교향곡 3번을 작곡했고  또한 '봘트슈타인 소나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트리플 협주곡'을 작곡했다. 기념실에서는 파스크발라티하우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게 기대할 만한 전시물이 없다. 하지만 베토벤 팬이라면 지나칠수 없는 집이다. 2019년 현재 이 집의 전시실은 임시 휴관이다. 이 집은 베토벤 당시에 빵집이었다. 비록 베토벤에 대한 전시품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도 비엔나에 있는 베토벤 기념관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질 전시품들이 있다. 베토벤이 이 집에 있게 된 것은 의사가 요양을 위해 시골집에서 지내라고 해서 온 것이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귀가 점점 들리지 않고 또한 여러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바람에 이곳에 있을 때에 말할수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신에 이 집에서 만든 음악은 숨막히게 하는 걸작들이었다. 전시실에서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18세기 비엔나의 교외풍경을 그린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 보청기이다. 교외풍경화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을 보는 것과 같다.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 92번지 건물에 붙어 있는 베토벤 기념명판

게브하르트가쎄 쪽을 바라본 되블링거 하우프트슈트라쎄.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있다.


○ 1구 묄커 바슈타이(Mölker Bastei) 8번지. 바슈타이는 옛 비엔나 성곽에서 보루가 있던 곳을 말한다. 그래서 주변보다 높은 곳이다. 이곳에 파스크발라티하우스가 있다. 베토벤은 이 저택에 1804년부터 1815년 사이에 자주 드나들었고 어떤 때는 상당 기간동안 머물기도 했다. 베토벤은 비엔나에서 자주 이사를 다녔다. 어떤 때는 두어 군데에 동시에 세를 얻어서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파스크바라티 하우스에서는 11년이란 긴 세월을 인연을 맺고 살았으니 이곳이야말로 베토벤이 정착했던 곳이라고 볼수 있다. 베토벤은 이 집에 있을 때에 교향곡 4번, 5번, 7번, 오페라 '휘델리오', 레오노레 서곡 3번, 피아노 협주곡 4번, 바이올린 협주곡, 현악4중주곡 Op 59와 95, 그리고 다른 작품들도 작곡했다. 피아노 소품인 '엘리제를 위해서'도 이집에서 작곡했다. 집안에는 몇개의 방이 기념실로 꾸며져 있다. 그렇다고 여러 전시물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몇 개의 그림들과 오리지널 악보, 그리고 피아노 한대가 있을 뿐이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수 있는 오디오 시설도 되어 있다. 베토벤이 살았던 다른 집들도 그렇지만 이 집도 베토벤이 지낸 방을 올라가자면 좁은 계단을 거쳐여 한다. 월요일은 쉬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그리고 공휴일에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다시 오후 2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문을 연다.


묄커 바슈타이 8번지 저택에 있는 기념명판

묄커 바슈타이 8번지 저택. 멀리 보이는 돔 건물은 비엔나대학교 본관이다.


○ 3구 운가르가쎄(Ungargasse) 46번지. 이 집은 'Altes Streicherhaus'라고 했었다. 1802년까지 피아노제작하는 공장이었다. 슈트라이허 가족은 이 건물에 '비엔나 메하니크'(Wiener Mechanik)라는 유명한 살롱을 마련했다. 이곳을 통해 베토벤은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와 피아니스트인 나네트 슈트라이허를 만나 교제하였고 평생을 둘도 없는 친구들로서 지냈다. 1812년 경에는 베토벤이 이 집에서 지내기도 했고 살롱에서 실내악을 연주하였다.


3구 운가르가쎄 46번지 집에 붙어 있는 명판. 'Altes Strecherhaus' Klaviermanufaktur ab 1802 Erfindung der berühmten 'Wiener Mechnik'  Ludwig van Beethoven, mit Andreas und der Pianistin Nanette Streicher befreundet und von Ihnen umsorgt, weilte hier um 1812 oft im beliebten Salon für Kammermusik 이라고 적혀 있다.

3구 운가르가쎄 46번지. 붉은 타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의 이곳에 있던 살롱에 자주 왕래하면서 실내악곡을 연주했다는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 19구 그린칭거 슈트라쎄(Grinzinger Strasse) 64번지. 베토벤이 유명한 극작가인 프란츠 그릴파르처와 함께 이 집에서 1808년 여름을 보낸 것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그린칭거 슈트라쎄 26번의 명판

그린칭거 슈트라쎄 26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 19구 누쓰봘트가쎄(Nusswaldgasse) 2번지. 베토벤이 1815년 여름을 보낸 집이다. 2차 대전 중에 완전파괴되었고 현재는 새로운 집이 들어서 있다. 베토벤은 이 집에서 첼로소나타 Op 102를 완성했다.


누쓰봘트까세 26번지의 명판. In dem wahrend der Krieges Handlungen des Zweiten Weltkrieges zerstortten Hause Silbergasse 4 wohnte Ludwig van Beethoven im Sommer des Jahres 1815 und schuf hier seine bei den Cellosotaten Op 102라고 적혀 있다. 원래의 집은 질버가쎄 4번였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누쓰봘트가쎄 2번지. 현재는 아랫층에 타바크(Tabak)가 들어서 있다.


○ 19구 칼렌버거 슈트라쎄(Kahlenberger Strasse) 26번지. 베토벤은 이 집에서 1817년 여름을 보냈다. 이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이 집은 그라이너하우스(Greinerhaus)라고 하며 최근 복원하여 새집처럼 되었다.


베토벤이 1817년 여름을 이 집에서 보낸 것을 기념하는 명판

칼렌버거 슈트라쎄 26번지


○ 1구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 8-10번지. 베토벤은 이 집에서 1815-1817년을 살면서 작품번호 101, 102, 98, 106, 137 등을 작곡했다. 이를 기념해서 일반적인 명판이 아니라 현대 추상화 스타일의 그림이 건물 외부 벽면에 그려져 있다.


베토벤이 1815-1817년 살았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작품

티퍼 그라벤 8-10번지 건물


○ 3구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Landstrasse Hauptstrasse) 26번지. 베토벤은 이 집에서 1817년을 살았다.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 26번지의 명판

란트슈트라써 하우프트슈트라쎄. 왼쪽에 붉은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있다.


○ 19구 화르플라츠(Pfarrplatz) 2번지. 베토벤은 1817년에 이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호이리거로서 마이어 암 화르플라츠(Mayer am Pfarrplatz)이다. 이곳에서 지내면서 어떤 작품들을 작곡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화르플라츠 2번지의 명판

19구 화르플라츠의 호이리거 마이어 암 화르플라츠


○ 8구 트라우촌가쎄(Trautsongasse) 2번지. 베토벤은 이 집에서 1819-20년 겨울을 보냈다. 이 집에서 장엄미사의 크레도에 대한 악상이 솟아났다. 트라우촌가쎄는 팔라멘트 뒷편에 있는 짧은 길이다.


트라우촌가쎄 22번지의 명판

트라우촌가쎄. 붉은 원이 있는 곳에 베토벤 명판이 있다. 아우어슈페르크슈트라쎄에서 바라본 것이다.


○ 6구 라임브루벤가쎄(Laimgrubengasse) 22번지. 베토벤이 1822년 10월부터 1823년 5월 17일까지 살았던 집이다. 비엔나 베토벤협회가 1972년에 명판을 만들어 설치했다.


라임그루벤가쎄 22번지 현관 위의 명판

6구 라임그루벤가쎄 22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있다. 나슈마르크트에서 박물관 구역 방향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 12구 헤첸도르퍼 슈트라쎄(Hetzendorfer Strasse) 75 a 번지.


헤첸도르퍼 슈트라쎄 75a 번지에 있는 명판. 베토벤이 1823년에 거주했었다는 내용이다.

헤첸도르퍼 슈트라쎄 75a. 지금은 아랫층이 베토벤 카페 레스토랑이다.


○ 3구 운가르가쎄(Ungargasse) 5번지. 베토벤은 1823/24년 겨울을 이 집에서 보내면서 교향곡 제9번을 완성했다. 명판은 비엔나의 슈베르트협회가 1924년에 설치한 것이다. 운가르가쎄는 슈타트파르크 뒷편에서부터 벨베데레까지 연결되어 있는 긴 길이다. 베토벤의 최대 걸작인 교향곡 9번은 1824년 5월 7일 비엔나의 케른트너토르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슈베르트협회는 교향곡 9번의 초연 1백주년을 기념하여 이 명판을 제작했다. 


베토벤이 이 집에서 교향곡 9번을 완성했다는 내용의 명판

운가르가쎄 5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 21구 예네봐인가쎄(Jeneweingasse) 17번지. 베토벤은 아마도 1825년이나 26년에 이 집에 손님으로 체류했었다. 그런 내용을 명판에 적어 놓았다.


예네봐인가쎄 17번지의 명판

예네봐인가쎄 17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 9구 슈봐르츠슈파니어슈트라쎄(Schwarzspanierstrasse) 15번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이다. 베토벤은 이 주소에 있던 집에서 살다가 1827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집은 1904년에 철거되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 명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Am dieser Stelle stand bis 1904 das Haus, in welchem Ludwig van Beethoven gewohnt hat undn in dem er am 26. Marz 1827 erbaulich starb. Errichtet im Einvemehmen mit dem Heiligenkreuz vom Rossauer Mannergesangsverein am 3 November 1929.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집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9구 알저그룬트의 슈봐르츠슈파니에슈트라쎄 15번지.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있다. 이 장소에 베토벤이 1827년 3월 26일 세상을 건물이 1904년까지 있었다. 이를 기념해서 1929년 11월에 비엔나의 로사우어 남성합창단이 기념명판을 설치했다. 


○ 8구 알저 슈트라쎄(Alser Strasse) 17번지. 알저키르헤(Alserkiriche: 알스교회).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교회이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베토벤이 비록 잠시나마 거주했던 곳이다. 교회 외벽에는 이를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 있다. 명판에는 Ludwig van Beethoven in dieser Kirche wurde der Leichnam des Unserblichen am 29. Marz 1928 eingesegnet. Wiener Schubertbund 1927. 라고 적혀 있다. 영결미사는 1827년 3월 29일 거행되었다. 기념명판은 베토벤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1927년에 비엔나의 슈베르트연맹이 설치했다고 되어 있다.


알저키르헤에서 영결미사가 열렸음을 기념하는 명판

알저 슈트라쎄에 있는 알저키르헤. 붉은 원으로 표시한 곳에 베토벤 기념명판이 있다. 길건너의 건물은 AKH(종합병원)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베토벤의 영결미사가 열렸던 알저키르헤의 회랑과 중앙제단. 알저교회는 삼위일체교회로서 미노리텐 종파에 속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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