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레하르

정준극 2018. 2. 19. 09:59

비엔나와 레하르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로 유명한 프란츠 레하르(Franz Lehár: 1870-1948)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있지만 헝가리는 자기네 작곡가라고 주장하고 있고 슬로바키아는 그들대로 자기네 작곡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레하르는 1870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헝가리왕국의 코마롬(Komárom)에서 태어났다. 코마롬은 헝가리의 북쪽, 지금의 슬로바키아의 국경에서 가까운 도시이다. 제국시절에는 코모른(Komorn)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2차 대전전후에 코마롬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 되었다. 그러다가 동구에서 공산권이 무너지는 것과 함게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분리되자 코마롬은 슬로바키아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명칭도 코마르노(Komarno)가 되었다. 레하르가 코마롬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헝가리계의 아버지인 프란츠 레하르 1세가 코마롬에 주둔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육군의 제50 보병연대의 군악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오페레타 작곡가인 프란츠 레하르를 과연 어느 나라 출신인지 가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관례에 따라 오스트리아 작곡가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레하르는 프라하음악원에서 공부했다. 프라하음악원에서는 안톤 드보르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비엔나의 군악대장으로 임명되자 1888년에 비엔나로 와서 아버지 군악대의 부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것이 비엔나와의 첫 인연이었다. 레하르는 2년 후에 동부 슬로바키아에 있는 로손츠(Losoncz: 현재의 Lucenec)의 군악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 20세였던 레하르는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악대장 중에서 가장 연소한 군악대장이었다. 그러다가 레하르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육군을 떠나 해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레하르는 1894년으로부터 1896년까지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리아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폴라(Pola: Pula)의 해군군악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에 크로아티아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군악대장으로 지낼수는 없었다. 마침 그 때에 레하르는 첫 오페라인 '쿠쿠슈카'(Kukuschka)를 완성했다. 이 오페라는 1906년에 제목을 '타티아나'(Tatjana)라고 바꾸어서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레하르는 잠시 생각을 멈추어서 제국의 육군에 입대하였다. 레하르는 트리에스트 수비대에서 복무했고 이어 부다페스트로 전출되었다가 1899년부터 1902년에는 비엔나에 주둔하게 되었다. 레하르는 비엔나에 배속되고나서 음악에 정진하여 1902년에는 역사적인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지휘자가 되었고 그해 11월에는 그의 오페레타인 '비엔나 여인'(Wiener Frauen)이 이 극장에서 초연을 갖게 되었다.

                                      

6구 테오발트가쎄 16번지에 부착되어 있는 레하르 기념명판. Zur Unterstutzung alter unverschuldet in Not geratenen Menschen. 이라고 적혀 있다. 레하르는 자선활동을 많이 하였다. 비엔나에서 가난하여서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후원하였다. 이에 대한 감사의 명판이 6구 테오발트가쎄 16번지의 집안에 설치되어 있다.

6구 테오발트가쎄. 16번지는 왼편 끝.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은 현관을 들어서면 벽면에 레하르 명판이 있다.


레하르와 나치의 관계는 불편한 것이었다. 레하르는 오페라 또는 오페레타를 작곡할 때에 거의 대부분 유태인 대본가를 기용하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레하르는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부인인 조피(Sophie: 결혼전 이름은 Paschkis)는 원래 유태인으로서 유태교를 신봉하다가 레하르와 결혼하고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때문에 나치는 레하르에 대하여 호감을 갖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하여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레하르에 대한 적대감이 줄어든 것은 나치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간섭하고부터였다. 괴벨스는 레하르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고 나치의 주요 행사에서 무도회가 열릴 때에는 레하르의 왈츠를 연주토록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1938년에 나치는 레하르 부린에게 '명예 아리안'(Ehrenarierin)이라는 신분을 부여하였다. 아리안인 저명인사와 결혼하여 명예스러운 아리안 민족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한때는 레하르 부인을 제3제국에서 추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레하르 음악을 선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레하르에게 미소를 보내야 했고 그러자니 레하르 가족들도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슈타트파르크의 레하르 기념상


예를 들어서 나치는 1941년 파리를 점령하고 나서 레하르 음악으로 프로그램을 만든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하르의 영향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레하르는 대본가 중의 한 사람인 유태계의 프리츠 뢰너 베다(Fritz Lohner-Beda)의 안전을 위해 히틀러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프리츠 뢰너 베다는 얼마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레하르는 1939년과 1940년에 히틀러로부터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괴테 메달도 받았다. 레하르는 1938년 히틀러의 생일을 맞이해서 히틀러에게 '메리 위도우' 50회 공연기념으로 만든 사진책자를 선물로 증정했다. 그 책자는 최고급의 모로코 가죽으로 표지를 만든 것이었다. 레하르는 비엔나 19구의 하크호퍼가쎄에 있는 저택에서 살았었다. 이 집은 과거에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집 이름을 레하르-쉬카네더 슐뢰슬(Lehár/Schikaneder-Schlössl) 이라고 부른다. 레하르는 말년에 바드 이슐에서 살았다. 레하르는 바드 이슐의 레하르 빌라에서 1948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레하르의 묘지는 바드 이슐에 있다.  

                    

레하르-쉬카네더 슐뢰슬에 설치되어 있는 레하르 기념명판. Wer kann der Tone Allgewalt emessen. Die Lust verklart und Leiden macht vergessen 이라고 적혀 있다.

19구의 하크호퍼가쎄. 18번지(왼편)이 레하르-쉬카네더 슐뢰슬이다. 한때 쉬카네더가 살았었고 훗날 레하르가 살았다.


바드 이슐의 레하르 빌라. 레하르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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