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살리에리

정준극 2018. 2. 19. 15:46

비엔나와 살리에


살리에리는 우리에게 별로 귀에 익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1985년에 미국영화 '아마데우스'(Amadeus)가 우리나라에서 상영되고부터 살리에리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도 깊어졌다. 영화에서는 마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시기하여서 그에게 과중한 작곡의뢰를 해서 결국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은밀히 의뢰한 작품은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레퀴엠'이었다는 것이다. 그거야 근거가 없는 스토리이지만 아무튼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당시 비엔나 사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던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살리에리는 베니스공국의 베로나 남쪽에 있는 레냐뇨(Legnano)에서 태어났다. 레나뇨라고 하면 베르디의 오페라 '레나뇨 전투'(La Battaglia di Legnano)가 우선 생각나는 지역이다. 레냐뇨 전투는 1117년 5월에 프레데릭 바바로사 황제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 군대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연맹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크게 패배하여서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북부가 외세의 압박으로부터 독립하는 불씨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


살리에리는 1770년대에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와서 음악활동을 하였다. 주로 오페라를 만들어서 여러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비엔나에서 살리에리의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살리에리는 18세기 후반에 비엔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발전시키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살리에리는 1774년부터 1792년까지 합스부르크 궁정의 이탈리아 오페라 감독으로 활동했다. 말하자면 비엔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1788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까지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카펠마이스터로서 활동했다. 그는 여러 후진 음악인들에게 레슨하였는데 프란츠 리스트, 베토벤, 슈베르트도 그의 제자였다. 비엔나에서 살리에리의 발자취는 현대 한군데 밖에 남아 있지 않다. 1구 괴트돠이어가쎄(Göttweihergasse) 1번지이다. 살리에리가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이 건물에는 그런 내용의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1구 괴트봐인가쎄 1번지에 붙어 있는 살리에리 기념명판. An dieser Stelle stand das Wohn- und Sterbehaus des Komponisten und Hofkapellmeiister Antonio Salieri 1750 - 1825라고 적혀 있다. 이 곳에 작곡가이며 궁정음악감독인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살았었고 세상을 떠난 집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1구 괴트봐인가쎄 1번지. 슈피겔가쎄와 만나는 모퉁이 집이다. 창문 위에 살리에리 명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물론 이 집은 당시의 집이 아니고 새로 지은 집이다. 괴트봐이어가쎄는 슈피겔가쎄의 중간 쯤에서 캐른트너슈트라쎄 쪽으로 있는 짧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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