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위대한 발자취

비엔나와 엠메리히 칼만

정준극 2018. 3. 1. 10:05

비엔나와 엠메리히 칼만


엠메리히 칼만


엠메리히 칼만(Emmerich Kálmán: 1881-1953)은 20세기 전반기에 프란츠 레하르와 함께 비엔나 오페레타의 백은시대를 주도했던 작곡가였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인 1882년에 헝가리 왕국에 속한 시오포크(Siofok) 지역의 임레 코프슈타인(Imre Koppstein)마을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임레 코프슈타인은 아름다운 발라톤(Balaton) 호수의 남쪽에 있는 전원마을이다. 칼만은 당시 부다페스트음악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작곡을 공부했다. 함께 공부한 음악도로서는 벨라 바르토크와 졸탄 코다이 등이 있다. 칼만은 처음에 교향시와 같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실제로 그의 교향시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와 '엔드레 에스 요한나'(Endre es Johanna)는 부다페스트에서 상당한 찬사를 받았다. 그후 그는 캬바레 노래들을 작곡하다가 아예 오페레타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첫 오페레타인 1908년도 '가을훈련'(Tatárjárás: Ein Herbstmanöver)는 대성공이었다. 이에 고취된 칼만은 오페레타의 본고장인 비엔나로 발길을 돌렸다.


'타타르야라스'. '가을훈련'의 무대


1909년에 비엔나에 온 그는 '집시 프리마'(Zigeunerprimas), '차르다스 왕비'(Die Csárdásfürstin), '마리차 백작부인'(Gräfin Mariza), '서커스 공주'(Zirkusprinzessin) 등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칼만은 유태인이었지만 히틀러가 아주 좋아하는 작곡가였다. 1938년에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히틀러는 칼만에게 '명예 아리안'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만은 히틀러의 제안은 단연 거절했다. 얼마후인 1940년에 칼만은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에 정착할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는 당장 칼만의 작품들에 대하여 금지조치를 내였다. 칼만은 전쟁이 끝나자 1949년에 비엔나로 귀환하였다가 1951에 파리로 가서 지냈으며 1953년 우리나라에서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해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4구 뷔덴의 파울라너가쎄 12번지에 붙어 있는 칼만 기념명판. 이 집에서 유명한 작곡가인 엠메리히 칼만이 1912-13년 살면서 작곡했다는 내용이다. 그의 대표작은 '가을 훈련' '차르다스 왕비' '집시 프리마' 등이라는 말도 적혀 있다. 명판의 사진과 글씨가 흐려서 잘 안보이며 더구나 한적한 곳에 있어서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4구 뷔덴의 파울라너가쎄 12번지 건물.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칼만의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18구 하제나우어슈트라쎄 29번지의 명판. 엠메리히 칼만이 이곳에 1930-39년까지 살명서 그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멜로디들을 작곡했다는 내용이다.

18구 하제나우어슈타르쎄 29번지의 집. 붉은 원으로 표시된 곳에 칼만에 대한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비엔나의 18구 튀르켄샨츠파르크에 있는 엠메리히 칼만의 흉상



바트 이슐의 쿠어파르크에 있는 엠메리히 칼만의 흉상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엠메리히 칼만 묘소. 그의 부인 베리와 딸 엘리자베트도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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