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호엔프리드버그 행진곡

정준극 2018. 6. 19. 21:57

1745년의 전황


1745년에는 세 차례의 대전투가 있었다. 호엔프리드버그(Hohenfriedberg), 케셀스도르프(Kesselsdorf), 퐁트누아(Fontenoy) 전투이다. 호엔프리드버그는 오늘날 폴란드에 속한 도브로미에르츠(Dobromierz)로서 당시에는 프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던 실레지아의 남부에 있는 마을이었다. 프레데릭의 프러시아군과 로트링겐 공작 샤를르(카를) 알렉산더의 오스트리아군이 전투를 벌여 프랑스군이 승전한 전투였다. 케셀스도르프는 당시에는 작소니의 수도인 드레스덴의 인근에 있는 마을이었다. 퐁트누아는 오늘날 벨기에에 속한 마을로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영 네덜란드에 속한 곳이었다. 퐁트누아 전투는 프랑스군이 영국-네덜란드-하노버의 연합군을 격파한 전투였다. 기왕에 호엔프리드버그 전투 얘기가 나와서 한 마디만 더 한다면, 호엔프리드버그 전투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이 전투 때에 프러시아 병사들이 부른 노래가 오늘날까지 호엔프리드버그 행진곡(Hohenfriedberger Marsch)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1745년 6월 4일 2차 실레지아 전쟁 중에 프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작소니 연합군이 호엔프리드버그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호엔프리드버그 행진곡의 가사를 1절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Auf, Ansbach-Dragoner/Auf, Ansbach-Bayreuth/Schnall um deinen Säbel/und rüste dich zum Streit/Prinz Karl ist erschienen auf Friedbergs Höh'n/Sich das preussische Heer mal anzusehn.

(일어서라 안스바흐-드라고너여/일어서라 안스바흐-바이로이트여/검을 빼어 들어라/전투를 위해 긴장을 늦추지 말아라/칼 공자가 프리드버그 언덕에 나타났도다/우리 프로이센 군과 겨루기 위해서)


호엔프리드버그 전투에서 프러시아군의 진격


1745년 해가 바뀌자마자 프러시아와 프랑스에 대응하는 4개 연합국이 성사되었다. 1월 8일의 바르샤바조역에 의해서 오스트리아, 영국, 더치 공화국, 작소니의 4개국이 연합하였다. 그로부터 12일 후인 1월 20일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장했던 바바리아의 샤를르 7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야 했다. 샤를르 7세의 아들인 바바리아의 막시밀리안 3세가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는 아예 후보에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더구나 바바리아군은 전세에 있어서도 불운했다. 바바리아군은 바타야니 백작 등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공세에 견디다 못해서 요새들을 하나하나 내주고 동쪽으로 후퇴만 거듭해야 했다. 인근에 있는 프랑스군이 바바리아를 돕기 위해 진군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헨호펜(Pfaffenhofen) 전투에서 패배하여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바바리아의 젊은 군주인 막시밀리안 3세는 뮌헨까지 포기하고 피난해야 했다. 그로부터 몇달 후인 4월에 휘센(Füssen)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막시밀리안 3세의 바바리아 통치권을 보장하는 대신에 막시밀리안 3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로레인의 프란시스를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지지한다는 조건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다시한번 동맹이 없이 고립되는 처지였다. 프랑스로부터의 지원도 기대할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플란더스와의 전투에 신경을 쓰느라고 프러시아를 도울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루이 15세는 모리스 드 작스(Maurice de Saxe) 원수와 함께 9만 5천의 군대를 이끌고 더치 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더치 공화국의 수비병력은 7만이었다. 루이 15세는 셸트(Scheldt) 계곡으로 진군하여서 투르네이(Tournay)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투르네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프랑스군 사령관인 모리스는 작전에 능하여서 영국군이 어느 경로로  공격해 오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모리스는 투르네이 동남쪽 퐁트누아(Fontenay)에서 영국군과 일전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군으로서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퐁트누아 전투에서 영국군 대령과 프랑스군 대령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만나서 누가 먼저 총격을 가할 것인지를 협의하고 있다. 별 일도 다 있다.


퐁트누아 전투는 1745년 5월 11일 새벽 5시부터 시작되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프랑스 포병이 영국 등 연합군 진영에 대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영국군 등은 투르누아를 공격하기 위한 진지 구축을 아직 하지 못한 상태여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정오쯤 되어서 컴벌랜드의 군대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유럽의 마당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영국군이 의례 우위를 차지하여 왔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또한 퐁트누아 전투를 통해서 한가지 더 파악하게 된 것은 보병보다는 포병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전투는 그후로도 오래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6월 20일에 투르누아는 프랑스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1745년 여름이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에 대하여 영국의 왕위는 챨스 에드워드 스투어트가 차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력히 요청하였다. 남의 나라 왕이 누가 되는지를 간섭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지만 프랑스는 퐁트누아 전투 이후에 영국에 대하여 태연하게도 그런 요청을 하였다. 프랑스의 속셈은 스코틀랜드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도록 하면 영국이 그일에 신경을 쓰게 되어서 유럽에서의 전투에 소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잘만하면 영국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뗄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었다.


영국의 정규군과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군의 컬로든 전투


1745년 7월 하순에 챨스가 스코틀랜드 북쪽 대서양의 헤브라이즈 제도에 있는 에리스케이 섬에 상륙하였고 이틀 후에는 영국 본토를 향해 선수를 돌렸다. 이어 8월에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자코바이트를 통해서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자코바이트는 퇴위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세력을 말한다. 샤를르는 자코바이트와 함께 영국을 상대로 싸울 스코틀랜드의 전사 1천 3백명도 확보하였다. 영국을 통치하고 있는 하노버 왕조의 조지 2세는 챨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데팅겐 전투의 명장 존 코우프 경을 사령관으로 삼아 전열을 가다듬었다. 존 코우프는 영국 정규군 2천을 데리고 북으로 향하였다. 한편 챨스는 9월에 퍼스(Perth)에 도착하였고 이어 9월 말에는 에딘버러의 항복을 받아냈다. 스코틀랜드에 도착한 존 코우프의 영국군은 프레스톤팬스라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존 코우프는 그곳이 샤를르의 반군을 맞이하여 전투를 벌일 적당한 장소로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작전상 유리한 지역은 아니었다. 이튿날 샤를르 군대가 공격을 감행하자 존 코우프의 영국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영국군이 패배하자 샤를르는 이제 스코틀랜드가 자신의 것인듯 생각했다. 그로부터 두어달 지나서 샤를르의 군대는 보병 5천에 기병 3백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샤를르는 마침내 1745년 11월 중순에 스코틀랜드 국경을 넘어서 영국을 침범하였다. 샤를르는 자코바이트 병력이 국경을 넘어 영국으로 들어가면 영국에 있는 자코바이트들이 아무때고 필요한 때에 내응할 것으로 믿었다. 스코틀랜드 자코바이트로서 영국내 자코바이트의 지원은 시급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의 정규군이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들을 3면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더구나 병력에 있어서도 영국이 훨씬 우위였기 때문이었다. 1745년 12월 초, 영국땅 중부인 더비까지 밀고 내려갔던 샤를르는 참모들이 지금 형편으로서는 어서 퇴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지 않을수 없었다. 샤를르의 군대가 더비에서 회군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프랑스군은 영국을 침공하려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자코바이트들은 스코틀랜드 내에서 하노바 군대와 싸우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며 영국에서 영국 정규군과 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다.


오늘날의 스코틀랜드의 퍼스. 비제는 이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퍼스의 어여쁜 아가씨'라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해가 바뀌어 1746년이 되었다. 1월 17일에 8천이나 되는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펄커크 무이르(Falkirk Muir)에서 영국의 정규군 7천과 전투를 벌여 영국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스코틀랜드군은 자코바이트들이 봉기한 이래 가장 많은 병력을 모은 것이었다. 그건 그렇지만 샤를르 스투어트는 1746년 4월 말에 컬로든(Culloden) 전투에서 영국에게 참패를 당하였다. 막상막하였다. 그런가하면 대륙에서는 엘바강 상류 지역에서 양측 군대의 이런저런 전투가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계속되어서 사람들에게 아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끝나지는 않았구나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그런 중에도 새로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출을 위한 작업도 계속 진행되었다. 당장 선출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었던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 '누구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해야 할지 조금 더 생각해 보자'면서 늑장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스트리아는 홧김에 제사 지낸다고 독일의 마인(Main) 계곡, 란(Lahn) 계곡,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쳐서 '자꾸만 황제 선출을 늦출 것 같으면 우리도 한 성질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들 지역에서의 전투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명장 트라운 백작의 작전이 주효하여서 프랑스군과 프러시아군은 다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리하여 결국 1745년 9월 13일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로레인의 프란시스가 프란시스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도 며칠 후에 영국과 함께 프란시스의 황제 선출을 인정하였다. 프레데릭은 프란시스의 황제 선출을 인정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실제지아를 프러시아가 합병한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건 안된다. 두고 보자 프레데릭'이라면서 거절하였다. 그 속셈에는 실레지아를 프레데릭으로부터 되찾고자 하는 소망이 있었다.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레지아를 놓로서 프레데릭과 다시 한번 담판을 짓기로 했다. 작소니가 그런 오스트리아의 편에 서서 제2차 실레지아 전쟁에 적극 참여키로 결정했다.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군과 일전을 겨룬 컬로든 전투에서의 컴벌랜드 공작


 프러시아군의 주력부대는 프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실레지아 남부의 프랑켄슈타인에 주둔하고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오늘날 폴란드의 자브코비체(Zabkowice)이다. 프랑켄슈타인의 프러시아군은 5만 9천의 병력에 약 55문의 대포를 배치하고 있었다.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7만의 오스트리아-작소니 연합군은 실레지아의 란데스후트(Landeshut)로 진격하였다. 란데스후트는 오늘날 폴란드의 카미엔나 고라(Kamienna Gora)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프레데릭은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병력을 이동하여 대응키로 했다. 프레데릭은 라이헨바흐로 군대를 이동하기 전에 샤를르 공자의 연합군이 호엔프리드버그를 우선 장악코자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따라서 프레데릭은 호엔프리드버그로 진격하는 샤를르 공자의 연합군을 맞이하기 위해 슈봐이드비츠(Schweidwitz)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프레데릭은 슈봐이드비츠에서 매복작전을 펼치키로 했다. 샤를르 공자의 연합군을 함정에 빠트릴 심산이었다. 프레데릭은 '쥐를 잡으려면 쥐덫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1745년 6월 4일, 오스트리아-작소니 연합군은 오랜 행군 끝에 매우 피곤해 있었다. 프레데릭의 군대는 동이 트기 전에 함정을 펼쳐 놓고 연합군을 유인하였다. 유명한 호엔프리드버그 전투였다. 연합군은 프레데릭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특히 기병에 있어서 그러했다. 연합군은 4분의 1 병력을 손실했다. 오전 9시에 샤를르 공자는 전군 퇴각명령을 내렸다.


오늘날의 폴란드 카미엔나 고라. 당시에는 실레지아의 한데스후트였다.


라이헨버그로 후퇴하였던 오스트리아-작소니 연합군은 전열을 가다듬어서 1745년 9월에 소르(Soor)로 진격하였다. 프레데릭은 2만의 병력으로 소르 근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샤를르의 군대는 4만 1천이나 되었다. 프러시아군은 숫적으로 너무나 열세여서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패전의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은 탁월한 전략으로 오스트리아-작소니 연합군과 얼굴을 맞대는 전투를 피하고 매복과 급습의 전략을 펼였다. 결과, 프러시아군은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샤를르의 군대는 보헤미아로 일단 후퇴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소르 전투였다. 그러나 소르 전투로서 제2차 실레지안 전쟁이 마무리 된 것은 아니었다. 비상시를 위해 마인에 주둔하고 있던 루토스브스키 지휘의 작소니 군대는 작소니 군대가 소르 전투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보헤미아에 있는 샤를르 병력도 재정비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토브스키의 작소니군은 베를린으로 향하였고 샤를르의 오스트리아군은 실레지아로 향하였다. 작소니군이 베를린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프레데릭은 허를 찔린듯 했다. 실레지아에 있던 프레데릭은 베를린을 방어하기 위해 가는 대신 작소니의 수도인 드레스덴으로 향하였다. 역으로 후방을 치자는 전략이었다. 프레데릭의 프러시아군은 1745년 11월에 작소니의 카톨리슈 헨너스도르프(Katholisch-Hennersdorf)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어 괴를리츠(Görlitz)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작소니는 거의 무방비나 마찬가지였다. 샤를르는 실레지아를 공격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작소니를 방어하기 위해 가야했다. 마그데부르크에 주둔하고 있던 또 다른 프러시아군은 루토브스키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엘베 상류로 이동하였다. 루토브스키는 마이센과 드레스덴 사이의 케셀스도르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러시아군의 레오폴드 사령관은 노련한 장군이었다. 작소니 군대가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케셀스도르프 전투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침내 프러시아와 실레지아에 대한 모든 군사작전을 중지할수 밖에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레데릭은 174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에 드레스덴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레데릭의 실레지아 합병을 인정하였고 대신에 프레데릭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프란시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것을 인정키로 했다.


드레스덴조약 체결 당시의 드레스덴 노이마르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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