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액스 라 샤플레 협정으로 막을 내리다

정준극 2018. 6. 20. 23:58

액스 라 샤플레(아헨) 평화협정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이탈리아 전투(1741-1747)


18세기만 해도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그런 중에도 이웃 강대국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서로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각축에 각축을 거듭하였다. 그러한 사태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두드러져서 유럽의 중심에서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이탈리아에서도 무슨 속셈들인지 하여튼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어떤 전투를 누가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럽 역사의 단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서 소개한다. 18세기의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군소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했는데 어떤 국가들이냐 하면, 북쪽으로부터 사르디니아 왕국(코르시카 섬 아래에 있는 사르디니아 섬도 포함), 그 옆의 롬바르디 왕국(수도는 밀라노), 이어서 제노아 공화국, 트렌트 추기경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루카 공화국, 동쪽으로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니스 공화국, 투스카니 대공국, 로마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 국가, 남쪽으로 시실리 왕국 등이다. 이들 중에서 아무래도 북부의 국가들은 지리적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가깝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었다.


밀라노 두오모와 빅토리오 에마누엘 2세 갈레리아. 밀라노는 롬바르디의 수도였다.


반복되는 설명이겠지만, 근대 초기의 이탈리아 역사는 외세의 지배시기라고 규정지을수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 전쟁(1494-1559) 이후에 이탈리아 남부, 밀라노 공국, 기타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몇몇 소공국들은 합스부르크의 직접적인 콘트롤을 받았다. 한편, 베니스공화국, 플로렌스 공국, 교황청 국가, 제노아 공화국 등은 그런대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피에드몽-사보이(Piedmont-Savoy)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으나 1551-1559의 이탈리아 전쟁 중에 사보이의 에마뉴엘 필리베르트 공작의 역할로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얻어 냈다. 메디치 가문은 계속 플로렌스를 통치하였다. 1537년 샤를르 5세와의 조약에 의해서였다. 메디치 가문은 나중에 교황 피우스(비오) 5 세로부터 투스카니 대공국의 통치가문으로 인정을 받기까지 했다. 이 시기에 교황청 국가는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불길이 유럽 전반에 걸쳐 요원하게 번지자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로 개종했던 신자들을 다시 로마가톨릭으로 역개종케 하는 반개혁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반개혁운동은 1563년에 막을 내린 트렌트공의회로부터 시작하여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 평화협정이 맺아지기까지 지속되었다. 로마 교황청이 반개혁운동을 펼친 시기는 유럽에서의 종교전쟁과도 시기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인들은 참으로 우수하여서 이 시기에 유럽의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영향력있는 활동을 하였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메디치의 캐서린(앙리 2세의 왕비, 프란시스 2세, 샤를르 9세, 앙리 3세의 어머니), 메디치의 메리(앙리 4세의 왕비), 콘치노 콘치니(루이 13세 치하의 정치인, 장관), 쥘르 마차린(추기경으로 루이 왕들 치하에서 재상) 등이 놀라운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여러 이탈리아인들이 신성로마제국의 사령관들로서 활약했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토르쿠아토 콘티(악마라는 별명의 30년 전쟁시 군사령관), 라이몬도 몬테쿠콜리(장군), 오타비오 피콜로미니(장군), 암브로지오 스피놀라(장군), 알렉산더 화르네세(합스부르크 네덜란드의 총독) 등 이탈리아 출신들이 활약했다.


이탈리아 여인으로서 프랑스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여인은 메디치가의 캐서린일 것이다. 앙리 2세의 왕비이며 세 국왕의 어머니였다. 그림은 메디치의 캐서린과 충성스런 부하들(Flying Squadron)


한편, 베니스 제국은 비록 레판토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동부 지중해에서 오토만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여서 키프러스(사이프러스)와 크레테를 내 주는 비참함을 당하였다. 베니스는 그레이트 터키 전쟁(1683-1699)에서 펠로폰네스를 장악하였으나 마지막 베니스-오토만 전쟁에서 되돌려 주어야 했다. 베니스는 한때 대서양 시대에 부를 누렸으나 신세계가 발견되고 이와 함께 대서양 시대가 열리자 사양길에 접어 들었다. 제노아 제국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오토만 터키와의 전쟁에서 에에게해의 소유지들을 잃었고 이어 북아프리카의 튜니시아, 그리고 그 후에는 코르시카까지 잃었다. 제노아의 몰락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노아는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왔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왕위계승전쟁(1702-1715)과 '4자연맹전쟁'(War of the Quadruple Alliance: 1718-1720)은 결과적으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서 주도권을 잡도록 해준 것이었다. 물론 폴란드왕위계승전쟁은 스페인이 부르봉왕가-두개의 시실리오서 남부 이탈리아에서 다시 세력을 떨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사보이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는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와 함께 토리노 공성(1706)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물리쳤고 이로 인해서 나중에 피에드몽-사르디니아 왕국이 탄생되었다. 이 피에드몽-사르디니아가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다. 합스부르크-로레인 왕가는 1737년에 플로렌스의 메디치 왕가를 이어 받았고 베니스는 1797년의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의 한 파트가 되었다. 이것이 18세기 이탈리아의 대체적인 사정이었다.


오늘날의 토리노(튜린).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741년에 주로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스페인인들, 그리고 나폴린인들은 가만히 먹고 살면 될 것을 왜그런지 하여튼 밀라노를 정복하자는 모토를 내걸고 군대를 조직하였다. 그래서 얼마후에는 4만이나 되는 민병대가 조직되었다. 스페인-밀라노 민병대는 몽마르(Montmar) 공작이 총사령관이 되어 모데나로 진군하였다. 그런데 모데나를 통치하고 있는 모데나 공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들의 취지에 동조하여 합세하였다. 오스트리아측에는 역전의 명장 트라운 백작이 있었다. 오토 페르디난트 폰 트라운 백작은 스페인-밀라노 민병대가 몰려오기 전에 먼저 모데나를 급습하여 장악하였다. 그리고 모데나 공작으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본국은 이탈리아에서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속 압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오스트리아와 샤를르 에마뉘엘의 사르디니아 왕이 협상에 들어갔다. 협상은 1742년초부터 토리노에서 시작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렌부르크 백작은 협상단 대표로 보냈고 사르디니아의 샤를르 에마뉘엘 왕은 도르메아 후작은 협상단의 대표로 보냈다. 1742년 2월에 두 대표는 토리노 협정(Convention of Turin)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는 동맹국이 되었다. 1742년 8월에는 트라운 원수가 스페인과 나폴리 민병대들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 영국 함대가 비록 규모는 작지만 나폴리 항구에 도착하였다. 나폴리는 몽마르 공작의 지휘를 받고 있는 나폴리 병력 1만을 급히 철수시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영국의 나폴리 공격에 대비하였다.


프랑스군을 추격하는 오스트리아군. 라밀리스 전투. 루이스 라게레 작


스페인-나폴리 연합군에서 나폴리 병력이 빠져 나가자 스페인 부대는 취약하게 되었다. 스페인군만으로는 포(Po) 계곡으로 진격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스페인 본국은 2차 지원군을 프랑스를 경유하여 이탈리아로 급파했다.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스페인군이 몰려오자 이제레 계곡에서 접전하였다. 그러나 사르디니아는 프랑스와는 전투를 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스페인군을 지원하였으나 막상 사르디니아와의 전투가 벌어지자 바쁜 일이 있다고 하면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도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프랑스를 상대로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아무튼 당시의 각국 정세는 묘한 것이어서 아침에는 적이 되었다가 저녁에는 동맹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전투가 스페인군에 유리하지 않게 진행되자 스페인은 몽마르 공작을 총사령관에서 해임하고 대신 가제(Gages) 백작을 스페인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743년이 되었다. 가제 백작의 스페인군은 캄포 산토(Campo Santo)에서 트라운 백작의 오스트리아군과 전투를 벌여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승리는 그것 한번 뿐이었고 이후 반년 동안 양측은 별로 할 일 없이 지내면서 식량이나 축내었다. 그러는 사이에 트라운 백작의 부대에는 독일에서 로브코비츠 영주인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등이 보충군으로 배속되었다. 트라운 백작은 스페인군을 저 멀리 리미니(Rimini)까지 몰아냈다. 그런데 스페인군은 어찌나 훌륭하게 후퇴를 하였던니 나폴리에서 이 소식을 들은 루소는 스페인의 퇴각을 '금세기에 가장 뛰어난 군사작전'이라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했다. 한편, 알프스 지대에서는 스페인과 사보이가 계속 전투를 하기는 했는데 무슨 목적으로 싸우는지, 무슨 성과가 있었는지 등등을 알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전투들이었다.


벨레트리의 중세 성문


1744년에 들어서자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 들었다. 잘 아는대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였다. 그러다보니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대외정책은 일견 같은 노선을 걷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 대한 대외정책도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에 대칭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공동의 적인 부르봉의 프랑스와 대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의 결말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합스부르크인 스페인의 카를로스(샤를르)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페인의 새로운 국왕은 결국 부르봉인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립(Philip of Anjou)에게 떨어졌다. 그가 스페인의 필립 5세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되자 세상 이치가 다 그런것 처럼 이탈리아에 대한 대외정책은 스페인과 프랑스가 노선을 같이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동맹인 오스트리아의 대외정책으 번번히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당사자인 이탈리아는 어떠했는가? 사보이의 샤를르 에마누엘 왕은 북부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들이 전통적으로 스페인의 간섭에 항거해 온 것을 지지하여서 스페인 적대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자 프랑스와 스페인은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사보이에 대한 군사행동을 펼치기로 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을 갈리스판(Gallispan)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실제로 전투를 앞두고서 갈리스판 장군들은 명령체계로 인하여 혼선을 빚었다. 예를 들어서 스페인군의 야전사령관인 콘티 공자는 스페인군 총사령관인 미나 후작과 뜻이 맞지 않아서 제대로의 작전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간의 갈등은 이유가 간단했다. 미나 후작인지 무언지가 현장사정은 하나도 모르면서 독단적으로 작전을 지시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갈리스판군은 알프스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필립 5세.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이다. 그가 스페인왕이 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의 통치가 부르봉 왕조로 옮겨졌다.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한 갈리스판군 중에서 콘티 야전사령관의 병력은 북부에 일단 주둔하고 있고 가게스 백작이 이끄는 병력은 중부 이탈리아로 향하기로 했다. 제노아 공화국은 친절하게도 이탈리아 중부로 향하는 갈리스판군의 길안내를 해주었다. 오스트리아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할수는 없었다. 로브코비치 공자의 오스트리아군은 스페인군과 일전을 벌여 스페인군을 저 아래 나폴리 접경지대에 있는 벨레트리(Velletri)까지 몰아냈다. 벨레트리는 저 유명한 시저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마을이었다. 이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마을에서 1744년 6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가제 백작이 이끄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과 로브코비치 공자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건곤일척을 내건 전투를 벌였다. 나폴리는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리 국경지대에서 너무 근접한 곳에서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군을 쫓아버리자면 스페인의 편을 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1744년 6월 16일 한밤중에 스페인, 프랑스, 나폴리의 연합군은 오스트리아 진영을 급습하였다. 이 전투는 '네미(Nemi)전투'라고 불리는데 네미라는 작은 마을에서 대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가 점거하고 있던 베렐르티 마을을 탈환할수 있었다. 그래서 이 전투를 '벨레트리 전투'라고도 부른다. 1744년 8월에 나폴리 왕은 벨레트리 마을이 연합군에 의해 탈환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개인적으로 벨레트리 마을을 시찰키로 했다. 첩자들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군은 벨레트리를 급습하여서 나폴리 왕을 놀라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1744년 8월 11일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각에 6천이나 되는 오스트리아군이 브라운백작의 지휘아랴 벨레트리 마을을 급습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마을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 나폴리 왕을 납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군이 마을을 이잡듯이 뒤졌지만 나폴리 왕은 그림자도 볼수 없었다. 나폴리왕은 오스트리아군이 급습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나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숙소의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서 말을 타고 도망갔기 때문에 요행히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날의 전투를 '2차 벨레트리 전투'라고 부른다. 오스트리아군은 벨레트리 작전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이것은 곧 오스트리아가 나폴리에서 더 이상 어깨를 펴고 다니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중세의 벨레트리. 줄리어스 시저가 태어난 마을이다.


1745년은 별다른 전투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1742년에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가 협동하자고 맺은 토리노 협정(Convention of Turin)은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제노아 공화국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다가 1743년 토리노 협정을 더욱 구체화한 봄스협정(Treaty of Worms)이 체결되자 제노아 공화국은 더 큰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제노아 공화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더 이상 중립을 지킬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제는 여기 아니면 저기에 기대어야 할 판이었다. 제노아 공화국은 부르봉 왕조에게 의지키로 했다. 이에 따라서 제노아 공화국은 부르봉 연맹(Burbon allies)과 비밀 조약을 맺었다. 부르봉 연맹은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를 말한다. 그리하여 제노아 공화국은 1745년 6월에 사르디니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로브코비츠가 스페인의 가제 백작의 군대를 저지하지 못하자 무척 실망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새로운 오스트리아군 최고사령관으로  로브코비츠 백작 대신에 슐렌부르크 백작을 임명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이 교체되자 부르봉군은 사기가 넘쳐나서 1745년 봄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가제 백작의 군대는 모데나에서 루카로 이동하였고 또한 알프스에 주둔하고 있던 갈리스판 군대도 이탈리아 리비에라를 통해 지중해에 면한 타나로(Tanaro)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갈리스판 군대와 가제 백작의 군대는 1745년 7월에 타나로에 집결할수 있었다. 그 병력이 모두 8만이나 되었다. 연합 병력은 피아첸자로 신속히 진군하여서 오스트리아군을 만나는 대로 격파하였다. 결과, 갈리스판 군대와 가제 백작의 군대는 알레산드리아, 발렌사, 카살레 몬페라토 등을 휩쓸며 점거하였다.


오늘날의 타나로. 타나로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정치적으로 복잡하여서 비록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통일을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프러시아와의 평화협정으로 당분간 전쟁을 치루지 않아도 되자 눈길을 북부 이탈리아로 돌려서 아스티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 수비대 6천을 공격하여 이들로부터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항복을 받아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브라운 백작은 포강 아래지대의 연합군을 공격하여 이들의 병력을 흩으러놓아서 서로 연락조차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결국 밀라노를 탈환하였고 내친 김에 북부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갈리스판 군대뿐만 아니라 프랑스군도 곤혹을 치루었다.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뒤로는 사르디니아 군대의 추격을 받아서 곤경해 처했었고 앞으로는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중에서도 1746년 8월, 로토프레도(Rottofreddo) 전투에서 앞뒤로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한 것은 기록에 남는 일이었다. 오스트리아군은 1746년 9월에 제노아 공화국을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뜻밖에도 제노아에서 철저한 저항을 받아서 그해 12월에는 할수 없이 제노아를 포기하고 철수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오스트리아가 제노아에서 퇴각하자 프랑스도 기지개를 켜고 오스트리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봄스 연합군, 즉 오스트리아와 사보이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별로 씨워보지도 못하고 아시에타 협곡에서 패배하였다. 아시에타 협곡은 해발 2천 미터나 되는 산악지대로서 이곳에는 좁은 군용도로가 하나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니 어떠했는지는 상상이 될 것이다. 이것을 콜 델라시에타(Colle dell'Assietta)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엘리트 귀족들 상당수가 전사했다. 봄스 연합군과 프랑스는 북부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1748년 액스 라 샤플레(아헨)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마침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심심하며 대포나 쏘아서 전투를 하는 것처럼 보여주고 그렇지 않으면 조용하게 지냈다.


아시에타 전투.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였다.

 

오스트리아가 북부 이탈리아를 콘트롤하게 되었지만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오스트리아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영국과 오월의 관계에 있는 프랑스는 계속 영국을 괴롭혔다. 특히 1745년 퐁트누아 전투 이후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영국군을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유럽에 파견되었던 대다수 영국군은 본국에서 자코바이트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영국과 연합을 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 더치는 약세를 보일수 밖에 없었다. 1746년에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더치를 뫼스(Meuse) 전선까지 몰아냈다. 프랑스는 서부전선에 있는 대부분의 중요한 요새들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내친김에 브뤼셀까지 진격하여 브뤼셀을 장악하였다. 이제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영국에 에스오에스를 보냈다. 영국은 비록 국내적으로 아직 안정이 안되었지만 오스트리아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고 더구나 프랑스가 기세를 올리는 꼴을 두고 볼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소하지만 다시 유럽 본토로 군대를 보내어 브리타니 남쪽에 있는 로리앙을 급습하였다. 네덜란드에 대한 프랑스의 지나친 관심을 돌려보자는 심산에서였다. 10월에는 유명한 라쿠(Racoux) 전투가 있었다. 라쿠는 리에즈 인근의 마을이다. 프랑스군이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연합군을 물리쳤다. 더치공화국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1747년 4월에 뫼스 상부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치고 올라갔다. 프랑스의 영향력이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까지 미치게 되었다. 결국 1746년 8월에 브레다(Breda)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브레다 성. 이 곳에서 브레다 평화협정이 논의되었다.


영국의 오렌지 공 윌렴 4세와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은 1747년 7월에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인근의 라우펠드(Lauffeld)에서 작스(Saxe)가 이끄는 프랑스과 전투를 벌였으나 심각한 패배만 경험하였을 뿐이었다. 작스 사령관은 승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군대를 움직여서 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타격을 주고자했다. 작스는 내친김에 브라반트 북쪽의 베르헨 오프 춤(Bergen op Zoom)을 점거하기 위해 비밀리에 로벤달(Lowendahl) 원수가 이끄는 군대를 급파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군은 9월에 베르헨 오프 춤을 휩쓸었으며 한두달 후에는 마스트리히트까지 위협을 가하였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마지막 해인 1748년에 드디어 마스트리히트의 항복을 받아냈다. 마스트리히트는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앙드레 류의 고향이다.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러시아는 네덜란드를 구하기 위해 대규모의 러시아군을 파견하였으나 사실상 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쯤해서 평화협상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군은 3만 병력이었다. 러시아의 병력 파견은 그저 전시효과였다. 액스 라 샤플레 평화협상은 주요 교전국간에 1748년 10월에 있었다.


8년간이나 끌었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끝을 맺기 위해 협상이 진행된 액스 라 샤플레(아헨)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748년 액슬 라 샤플레 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는 스타투스 쿠오 안테 벨룸(Status quo ante bellum)을 유지하게 되었다.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다만, 오스트리아는  아쉽게도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양도해야 했고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비록 규모는 적으나 여러 영토를 스페인에게 양도해야 했다. 오스트리아로서 실레지아를 잃은 것은 사실 전체적인 영토의 규모에 비추어서 크게 타격을 받는 일은 아니었지만 독일국가로 구성된 신성로마제국의 주도국가로서 오스트리아의 위상이 두드리저게 손상된 것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반면에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으로 인하여 영토가 거의 배가되었고 인구와 경제에서도 현저하게 확장되는 이익을 보았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국왕을 이후 '프레데릭 대제'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이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유럽에서 동등한 입장의 양대 축이 되었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독일 국민주의에 불을 붙여서 독일 통일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게 되었음을 뜻하였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어떠했는가? 프랑스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루이 15세는 프랑스가 점령한 모든 영토들을 원래의 소유자에게 되돌려 주었다. 명예스러운 행동이었다. 루이 15세는 '짐은 프랑스의 왕이지 장사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루이 15세가 이런 자세로 나오자 다른 나라들은 환영하였지만 전투에 나가서 싸웠던 많은 장군들과 귀족들, 그리고 심지어는 일반 백성들까지도 '저 양반이 망녕이 났나?'라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서 루이 15세는 프랑스 국내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프랑스는 전쟁터에서 피흘린 대가 치고는 너무나 작은 분량만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Travailer pour le roi de Prusse(프러이사 왕을 위해서 피땀 흘렸도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Bete comme la paix(평화처럼 어리석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커다란 모욕감을 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극히 싫어했던 프레데릭에 대하여는 어떤 입장이었는가? 프랑스는 몇차례의 전쟁을 통해서 프러시아를 크게 도와주었다. 프러시아의 기를 크게 살려준 셈이었다. 이러한 배려는 나중에 결국 프랑스의 손해로 다가왔다. 프러시아는 어느틈엔가 자기들을 도와 준 프랑스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서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봄스 평화협정등 두번에 걸친 협정을 체결하면서도 프랑스에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이 15세는 프레데릭을 대단히 싫어했다. 그리고 믿을수 없는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원래 부르봉과 합스부르크는 해묵은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5세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이 밉게 행동하는 일이 많자 생각을 달리해서 프러시아 보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를 맺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스페인은 어떠했는가? 이번 전쟁을 통해서 얻을 것은 얻은 셈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의 위세를 회복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영국은 유리한 협상을 통해서 전쟁에서 물러날수 있었다. 전쟁을 통해서 손해도 보았지만 실속을 챙기는데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영국의 세력은 전보다 더 강해졌고 더 복잡해 졌다. 이 점이 오스트리아를 분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장사속이 빨라서인지 오스트리아가 유럽에서 더 이상 패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판단하여서 프러시아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 영국의 속셈은 프러시아와 손을 잡음으로서 앞으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프랑스의 하노버 왕조에 대한 공격을 사전에 방비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프러시아가 그렇게도 강력하게 성장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영국은 프러시아가 독일을 통일하고 그후에 벌어진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될지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과 연계되어서 있었던 전쟁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정리해 보자.

- 1차 실레지아 전쟁(1740-1742)




- 2차 실레지아 전쟁(1744-1745). 사실상의 1차 실레지아 전쟁의 연장. 프러시아가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 1차 카르나틱 전쟁. 인도에서 영구과 프랑스의 라이발적인 적대행위는 간혹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 러시아-스웨덴 전쟁(1741-1743). 러시아와 스웨덴이 각기 오스트리아를 돕는다는 명목아래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러시아와 스웨덴의 두 라이발의 전쟁이기도 했다.

- 킹 조지의 전쟁. 영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신대륙 아메리카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한 듯힌 인식을 주었다.

- 젠킨스의 귀 전쟁. 영국과 스페인간에 신대륙에서의 보물 운송과 관련하여 전투를 벌인 것도 포괄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일환이라고 볼수 있다.

- 1745년 스코틀랜드에서의 자코바이트의 봉기. 프랑스가 영국 왕위를 주장하며 영국을 침공하였을 때에 프랑스가 일부 지원하였다. 이것도 역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한 파트로 간주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