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마담 스네이크

정준극 2018. 6. 26. 21:06

마담 스네이크....프랑스의 왕비, 세 국왕의 모후

메디치의 카테리나(Caterina de Medici: 캬트린 드 메디시스)



메디치의 카테리나


'마담 스네이크'는 글자그대로 뱀처럼 차갑고 잔인하며 사악한 여인을 말하는 별명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뱀을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비유했기 때문에 '마담 스네이크'라고 하면 차갑고 잔인하기는 하지만 지혜도 있는 여인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마담 스네이크'는 16세기에 프랑스의 왕비였고 그의 아들 세명이 프랑스 국왕의 자리에 앉았던 캬트린(카테리나)을 말한다. 서구 역사에 있어서 메디치의 카테리나만큼 파란만장하고 괴이한 생애를 살았던 여인도 없을 것이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1547년부터 1559년까지 12년 동안 프랑스의 국왕 앙리 2세의 왕비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인 프란시스 2세, 샤를르 9세, 앙리 3세는 차례로 프랑스의 국왕의 자리에 앉았었다. 프랑스 역사상 그러한 대단한 여인은 없었다.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 국정에 깊은 관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구나 아들인 샤를르가 10세에 프랑스 국왕이 되자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직접 섭정이 되어 3년 동안 프랑스를 실질 통치한 일도 있다. 우리는 근대 서양사를 장식한 위대한 여성 군주로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제정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 등을 들지만 실은 메데치의 카테리나도 그에 못지 않은 대단한 여인이었다. 다만, 훌륭한 업적도 이루었지만 그보다는 악명 높은 여인으로서 더 잘 알려진 여인이었다. 이제 메디치의 카테리나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등등을 총정리해 본다. 카테리나에게는 마담 스네이크 이외에도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고아 카테리나, 감금 생활의 카테리나, 프랑스의 왕비 카테리나, 모후 카테리나, 정치가 카테리나 등등이다.


14세의 신부 카테리나. 실제 모습은 이렇지 않았을 것이지만 예전에는 그림 그리는 사람의 마음대로였다. 키도 크고 잘 생기게 그려달라고 하면 그렇게 했다. 그러므로 위의 그림에 나오는 카테리나가 실제 모습인지는 확실치 않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발음부터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이탈리어로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e Medici)라고 하며 프랑스어로는 캬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라고 발음한다. 카테리나는 아버지는 메디치의 로렌초 2세(Lorenzo II de'Medici)이며 어머니는 마들레이느 드 라 투르 도베르뉴(Madeleine de La Tour d'Auvergne)이다. 카테리나는 1547년부터 1559년까지 12년 동안 프랑스의 왕비였다. 남편 앙리 2세가 1559년에 세상을 떠나자 큰 아들인 프란시스가 프란시스 3세로서 1559년에 국왕이 되었지만 1년 후인 1560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둘째 아들인 샤를르가 샤를르 9세로서 1560년부터 1574년까지 형식상으로는 14년간 프랑스의 국왕이었다. 그런데 샤를르가 국왕이 될 때에 그는 겨우 10세의 소년이었다. 그래서 카테리나가 몇년 동안 섭정으로서 국사를 관장하였다. 샤를르 9세가 1574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 다음 아들인 앙리가 앙리 3세로서 1574년부터 1589년까지 15년간 프랑스의 국왕이었다. 카테리나는 앙리 3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589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어찌되었든 카테리나는 자기 자식 중에서 프랑스의 국왕을 세명이나 배출했으니 그런 예는 서양사에서 찾아보기가 힘든 일이다. 그런데 카테리나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가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그의 아들이 세명이나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도 실은 그의 두 딸이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첫째 딸인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는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왕비였고 셋째 딸 마르게리트(마가렛) 드 발루아는 나바레의 왕비였다가 나중에는 프랑스의 왕비까지 겸했던 인물이다.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가 유명한 것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며 마르게리트 드 발루아가 유명한 것은 영화 '퀸 마르고'의 주인공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메디치의 카테리나와 프랑스 왕세자 앙리의 결혼식. 신랑신부 모드 14세였다. 1533년. 하지만 그림은 어른들로 그려 놓았다. 키가 크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한쪽에는 난장이도 그려 넣었다.


간혹 메디치의 카테리나를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나 헝가리의 귀족인 바토리 에르체베트(Báthory Erzsébet), 그리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카타린 등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과 비슷한 처지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비교하는 것은 카테리나도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어 성장했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에르체베트와 비교하는 것은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국민들, 특히 주변 사람들을 믿지 못하여 무차별하게 제거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와 같다는 것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섹스까지도 무기로 삼았으며 남자 관계에 있어서 음모와 술수를 능란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같은 처지였다고 하는 것은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여 말할수 없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다만, 카테리나는 나중에 아들들을 낳게 되었지만 결혼 초기에는 왕비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여 모진 수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무튼 카테리나는 이 모든 역경들을 좋게 말해서 극복하였고 나쁘게 말해서 질투와 모함과 음모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카테리나는 수십년 동안 비공식적인 프랑스의 리더였다. 아마 동양으로 보면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다가 나중에 측천무후라고 불린 무조와 흡사한 인물이라고 볼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절대권력을 지녔다는 저점에서 흡사하다. 카테리나와 측천무후는 두 사람 모두 장수한 편이었다. 카테리나는 68세까지 살았으나 측천무후는 80세에 세상을 떠났다.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첫 황제였으며 마지막 황제였다. 625-705. 간혹 메디치의 카테리나를 측천무후에 비교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고대 중국에서는 미인이었던 모양이다.


16세기에 헝가리에 살았던 바토리 에르체베트는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여인으로서 기네스 북에 오른 인물이다. 수백명을 죽였다는 것이다. 주로 젊은 여인들을 죽였다. 믿을만한 것은 되지 못하지만 이떤 기록에 의하면 바토리 에르체베트는 총 650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도 권력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을 제거했다. 하기야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만명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그에게는 비교되지 않지만 아무튼 카테리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카테리나를 아라곤의 캐서린과 비유하는 것은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인 캐서린은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구실로 소박을 받아 세상 떠날 때까지 음습한 성에서 혼자 지냈다. 메디치의 카테리나은 결혼후에 상당기간 동안 자녀를 생산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었으나 나중에는 그럭저럭해서 자녀들을 낳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1519년 4월 13일에 피렌체(플로렌스)에서 테어났다. 메디치의 로렌초 2세의 유일한 딸로 태어났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카테리나가 태어난지 한달도 되지 않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카테리나는 딸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영지나 작위를 상속받을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카테리나가 불쌍하여서 '두케시나'(Duchesina: The Little Duchess)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부모를 잃은 카테리나는 이집저집 친척집들을 전전하면서 마치 천덕꾸러기처럼 자랐다. 친척들은 상속재산도 없는 카테리나를 귀찮게 여겼던 것이다.



헝가리의 바토리 에르체베트.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인 여인으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카테리나도 권력을 잡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수없이 제거하였다. 그래서 프랑스의 바토리 에르체베트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러던중에 카테리나가 여덟살 때에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디치가에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납치를 했던 것이다. 어린 카테리나는 어느 수녀원에서 마치 감금되어 있는 듯한 생활을 했다. 남들처럼 가장 행복해야할 소녀시절을 수녀원의 어두운 방에서 지냈던 것이다. 카테리나가 열살 때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플로렌스를 공성한 일이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메디치가의 유일한 정통 혈육인 카테리나가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을 알고는 메디치가의 뿌리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카테리나를 제거할 생각까지 했지만 바티칸의 중재로 죽음만은 면할수 있었다. 그후 카테리나는 삼촌뻘이 되는 교황의 배려로 바티칸에서 지낼수 있었다. 아무려나 그래도 카테리나는 메디치가의 혈육이었다. 정당한 상속자가 없으면 카테리나가 메디치가의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을 입장이었다. 그러자 유럽의 여러 왕실들이나 지체 높은 귀족 가문에서 카테리나에 대하여 유별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카테리나는 마침내 프랑스의 왕세자인 앙리와 정혼을 하게 되었고 1533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가 카테리나가 14세였고 남편인 앙리 왕자도 14세였다. 중국 당나라의 고종 시절에 14세의 무미랑이라는 소녀가 당고종의 궁녀로 들어간 것도 14세 때였다. 그가 나중에 후주의 황제가 된 측천무후였다. 그나저나 카테리나는 프랑스의 앙리 왕자와 결혼식까지 올렸는데 그로부터 얼마후에 삼촌인 교황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새로 교황이 된 사람은 카테리나가 바티칸에서 지낸 것을 이유로, 또한 이탈리아의 재산이 프랑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서 카테리나의 지참금을 주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프랑스 왕실에서 카테리나의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내노라하는 재산을 가진 메디치가의 유일한 정통 혈육인데 돈 한푼이 없어서 지참금을 내지 못하게 되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가 카테리나가 결혼한지 1년 후, 즉 15세 때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무튼 새신랑인 앙리는 카테리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수많은 정부들과 지내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신랑 앙리도 15세였는데 사람이 조숙해도 너무 조숙해서인지 그 나이에 벌써부터 이여자 저여자와 뜨거운 관계를 맺으며 마치 꽃을 찾아 다니는 나비처럼 보통 바람을 피운것이 아니었다. 카테리나는 결혼후 몇년이나 독수공방이었다. 그러는 중에 신랑 앙리가 마침내 한 여자와 보통 이상의 죽고 못하는 관계를 맺으며 지냈는데 디아느 드 뿌아티에(Diane de Poitiers)라는 여인이었다. 문제는 디아느 드 뿌아티에가 당시에 38세였다는 것이다. 앙리보다 23세나 나이가 많았다. 아무리 연상이 좋다고 해도 그건 너무한 처사였다. 하지만 앙리와 마담 뿌아티에의 뜨거운 관계는 상당히오래 계속되었다.  


앙리 2세의 정부인 디아느 드 뿌아티에를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에 비추어 그린 작품. 멀리 보이는 성은 앙리 2세가 마담 뿌아티에에게 선물로 준 샤토 드 슈농소


카테리나는 앙리에게 있어서 원치 않았던 부인이었다. 다른 여자가 앙리의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카테리나는 자연히 왕궁에서 외톨이가 되어 갔다. 시집식구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카테리나가 아들만 낳았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결혼후 10년이 지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 혹자들은 혹시 남편 앙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정부가 아이들을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아들 하나는 니콜 드 사비니(Nicole de Savigny)라는 정부에게서 얻었는데 니콜 드 사비니가 누구냐하면 훗날 마리 앙뚜아네트 시절에 저 유명한 '목걸이 사건'을 일으킨 잔느 드 라 모트(Jeanne de la Motte)의 선조이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왕실 여인들의 사명은 후사를 이을 아이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카테리나의 고심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상황이 이럴게 되자 프랑스 왕실에서는 카테리나와 앙리를 이혼시키던지 또는 결혼자체를 무효로 만들자는 얘기가 서서히 나돌기 시작했다. 다른 왕실에서 이혼이니 결혼무효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어떤 형태로든지 결론이 난다. 대부분 이혼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카테리나의 경우는 달랐다. 이혼이니 결혼무효니 하는 얘기는 카테리나의 운명이 비로소 새로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화에서 디아느 드 뿌아티에와 카테리나. 카테리나는 앙리의 아이를 갖기 위해 마담 뿌아티에의 도움으로 침대에서의 임무교대까지 서슴치 않았다.


대체로 정부는 자기 남자를 위해서 무슨 행동이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기이한 행동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남편을 딴 여자에게 빼앗긴 부인도 남편이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무슨 행동이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사랑의 묘약이라도 있다면 서슴치 않고 마신다는 것이다. 앙리의 정부인 마담 뿌아티에는 앙리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부렸다. 고대 인도의 카마 수트라를 연구하여 침대에서 적용하는 일까지도 했다. 카테리나는 마담 뿌아티에를 만나서 어떻게하면 앙리의 마음을 돌아오게 할수 있을지를 의논했다. 마담 뿌아티에도 대단한 여인이라서 카테리나를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우선 마담 뿌아티에는 앙리에게 '제발 집에 가서 부인하고 시간을 많이 좀 보내세요'라고 호소해 주었다. 아무튼 함께 침대를 써야 아이가 생길 것이 아니냐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카테리나에게 카마 수트라에 나오는 특별한 체위에 대하여도 조언을 해 주었다. 앙리의 성기가 기형이기 때문에 그에 맞는 체위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어떤 때는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어서 작업을 같이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마담 뿌아티에가 우선 앙리와 함께 침대에서 뜨겁게 열을 올리고 나면 그때 카테리나가 마담 뿌아티에와 교대하여 침대에 들어가서 앙리와 클아이막스를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카테리나는 마담 뿌아티에의 도움으로 온갖 테크닉을 다 구사하여 마침내 임신하는데 성공했다. 결혼한지 11년만이었다. 이후 카테리나와 앙리는 토탈 아홉명의 자녀를 생산하는데 그중에서 여섯명이 무사히 유아기를 보냈다. 앙리는 카테리나와 결혼한지 14년 만에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카테리나는 비로소 왕비라는 호칭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담 뿌아티에는 계속 앙리의 정부로서 소임을 다하였다. 왕궁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에도 마담 뿌아티에가 마치 왕비처럼 행세하는 경우도 많았다. 카테리나는 그저 꾹 참고 지냈다. 하기야 마담 뿌아티에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그늘에서 지내는 것을 참고 받아들였다. 앙리는 마담 뿌아티에에게 샤토 드 슈농소(Chateau de Chenonceau)를 선물로 주었다. 이 샤토는 카테리나가 갖고 싶어서 꿈을 꾸던 성이었다.


앙리 2세가 마담 뿌아티에에게 선물로 준 샤토 드 슈농소. 평소에 카테리나 왕비가 갖고 싶어한 성이다.


카테리나의 운명은 남편 앙리 2세가 1559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었다. 앙리 2세는 마상무술시합에 나갔다가 눈과 뇌를 다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때 카테리나의 나이는 40이었다. 카테리나와 앙리 사이에서 태어난 첫번째 아들인 프란시스가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프란시스는 그때 고작 15세였다. 그로부터 카테리나는 프랑스 왕관이 뒤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2세는 혼자서도 충분히 왕노릇을 할수 있는 나이였지만 건강이 여의치 못했다. 카테리나는 프란시스 2세의 정부에서 어떠한 직책도 갖지 않았지만 모후로서 말 한마디가 법이나 마찬가지일만큼 영향력이 컸다. 사람들은 그런 카테리나는 공동섭정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카테리나의 모진 앙갚음이 시작되었다. 우선 마담 뿌아티에에 대하여는 사실 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국가 재정을 위한다는 구실로서 마담 뿌아티에가 소유하고 있는 보석들과 그리고 저 유명한 샤토 드 슈농소를 반납토록 했다. 카테리나는 자기의 권력을 개인적인 이유로는 도도록이면 사용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고 싶으면 아들 프란시스를 통해서, 또는 정부의 다른 각료들을 통해서 시행하였다. 당시에 프랑스는 종교적으로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있었다. 프랑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이지만 사회에서는 개신교인 위그노가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특히 나바레 왕국에서는 위그노가 큰 동조를 받고 있었다. 카테리나는 프랑스의 위그노에 대하여 처음에는 관대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정부에 반기를 들지 않는한 평화스럽게 예배를 볼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부르봉의 형제들인 꽁드의 루이 공자와 나바레의 안투안 공자는 꼭 그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카테리나의 평화 정책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카테리나는 루이를 궁전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체포하고는 감옥에 가두었다. 루이는 왕권에 대한 도전을 했다는 명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루이가 감옥에 있을 때에 프란시스 왕은 귓병이 악화되어 결국 왕으로 즉위한지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의 귀족들은 다음 국왕으로서 부르봉의 사람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부르봉의 대표적인 인물이 꽁드의 루이(Louise de Conde)와 나바레의 안투안(Antoine de Navarre)이었다. 카테리나로서는 발루아 가문을 위해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의 카테리나(캬트린)


카테리나는 가톨릭과 위그노의 갈들 상황을 권력 강화의 기회로 보았다. 카테리나는 루이의 동생인 안투안과 네고를 하였다.루이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부르봉이 발루아에 어떠한 위협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네고였다. 말하자면 부르봉은 프랑스의 왕권에 대하여 어떠한 욕심도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협상이 카테리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자 카테리나는 프랑스 총독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었다. 이것은 카테리나가 더 이상 형식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란시스 2세의 뒤를 이어 샤를르가 샤를르 9세로서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카테리나의 셋째 아들이었다. 샤를르가 왕위에 오를 때에 겨우 아홉살이었다. 형인 프란시스보다 더 절실하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나이였다. 어머니인 카테리나가 자연스럽게 섭정이 되었다. 카테리나는 위그노와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정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위그노의 등장을 위협으로 보았던 로마가톨릭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로마가톨릭과 위그노의 분쟁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심지어는 총칼을 들고 서로 죽이는 싸움까지도 자주 일어났다. 위그노와의 전투가 점차 유혈사태로 치닫자 카테리나로서도 더 이상 방관할수 없었다. 위그노에 대한 정책을 변경했다. 1568년 이후로는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대신에 그들을 파괴하는 정책을 견지하였다. 역사적으로 가장 참혹한 종교탄압 사건 중의 하나인 '성바르톨로뮤 학살' 사건이 카테리나의 시대에 터졌다는 것은 평화를 외치던 그의 정책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것이었다. '성바르톨로뮤 대학살'의 배경에 대하여는 조금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1572년 8월 24일 성바르톨로뮤 축일에 로마가톨릭 추종자들이 개신교인 위그노 신도들을 학살한 대사건. 파리에서 2천명이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전국적으로는 7만명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카테리나는 자기의 자녀들의 결혼을 통해서 유럽에서의 세력을 넓히고자 했다. 하기야 주로 딸들을 다른 나라 왕실로 시집보내어 유대관계를 굳게 하려는 것은 당시 유럽 왕실의 하나의 관례나 마찬가지였다. 훗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보면 그랬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보면 그랬다. 카테리나는 큰딸 엘리사베트를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시켰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평화를 위한 제스추어였다. 그런데 엘리사베트는 아기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카테리나는 막내 딸인 마가렛을 왕비가 없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시집보내려했다. 그러나 스페인 왕이 그럴수 없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큰 딸인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에 대한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그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에 나오는 엘리사베트 드 발루아이다.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는 스페인의 필립 2세의 아들인 돈 카를로스와 파리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어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지만 양국간의 협정에 따라 스페인의 국왕과 결혼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돈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필립 2세와 결혼하였으나 아기를 출산하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또 다시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카테리나의 자녀들이 누구누구인지 소개하지 않을수 없다. 카테리나는 5남 5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둘째 아들 루이는 생후 1년 만에 사망하였고 마지막으로 쌍둥이 여아를 출산하였으나 하나는 태어난날 사망하였고 다른 하나는 두달도 되지 못하여 사망했다. 자녀들은 거의 연년생으로 태어났음을 알수 있다. 인간이기에 앞서서 자녀생산이 목적인 여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자녀들 중에서 세명의 왕이 나왔고 두명의 왕비가 나왔다.


1. 프란시스 2세(1544-1560). 프랑스 국왕

2. 엘리사베트(1545-1568). 스페인 필립 2세의 왕비. 엘리사베스 드 발루아

3. 클로드(1547-1575). 로레인 대공비

4. 루이(1549-1550). 오를레앙 공작. 생후 1년만에 사망

5. 샤를르 9세(1550-1574). 프랑스 국왕

6. 앙리 3세(1551-1589). 프랑스 국왕

7. 마가렛(1553-1615). 나바레의 앙리 4세의 왕비. 나중에 프랑스 왕비. 마가렛 드 발루아. Margot.

8. 프란시스(1555-1584). 앙주 공작

9. 조안 공주(1556-1556). 생후 사망. 빅토리아 공주와 쌍둥이

10. 빅토리아 공주(1556-1556). 생호 1개월 24일 후에 사망. 조안 공주와 쌍둥이


영화 '퀸 마르고'에서 마르고(마르게리트, 마가렛)과 나바레의 앙리 4세와의 결혼식 장면. 사실상 마르고는 대단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카테리나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시집보내려던 딸 마가렛을 나바레의 왕인 앙리 4세와 결혼시켰다. 그 마가렛이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 '왕비 마르고'(La Reine Margot)의 주인공인 마르고이다. 뒤마의 소설 '왕비 마르고'는 여러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최근의 작품은 1994년 프랑스에서 만든 '왕비 마르고'이다. 이사벨르 아쟈니(Isabelle Adjani)가 마르고 역할을 맡았고 비르나 리지(Virna Lisi)가 카테리나 역할을 맡았으며 나바레의 앙리 4세의 역할은 다니엘 오퇴일(Daniel Auteuil)이 맡은 영화이다. 마가렛과 나바레의 앙리는 1752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인하여 결국은 몇 달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바르톨로뮤 대학살'은 마가렛과 앙리의 결혼식이 있은지 불과 며칠 후에 발생하였다. 위그노의 앙리가 결혼식을 올리는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에 프랑스에 있는 위그노들이 대부분 파리에 모여 결혼을 축하코자 했다. 그러자 카테리나와 샤를르의 지시를 받은 군인들이 파리에 올라와 있는 위그노들을 거의 모두 살해했다. 공식적으로는 3천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 많았다는 주장이다. 파리에서의 대학살은 지방으로 번져서 지방에 있는 위그노들이 수주일간에 걸쳐서 거의 모두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하여튼 그리하여 카테리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잔인한 여인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카테리나와 비교될수 있는 잔인한 여인으로는 헝가리의 바토리 에르체베트가 얘기될 정도였다.


성바르톨로뮤 대학살 사건이 일어난후 파리 시내의 상황을 시찰하는 카테리나 모후(검은 드레스의 여인)


성바르톨로뮤 대학살 사건이 벌어진지 2년 후인 1574년에 샤를르 9세가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재위 14년이었다. 샤를르도 평소에 병약했기 때문에 그나마 14년 동안 왕위에 있었던 것은 보통 이상의 일이었다. 샤를르 9세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동생인 앙리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때 앙리는 파리에 있지 않고 지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당장은 카테리나가 섭정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앙리는 앙리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앙리 3세는 큰형 프란시스, 또는 바로 위의 형인 샤를르와는 달리 성품이 강인했고 더구나 핸섬했다.  전투에도 아주 능했다. 그리고 프란시스가 15세에, 샤를르가 10세에 왕이 된 것과는 달리 23세라는 나이에 왕이 되었다. 앙리는 카테리나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그런데 앙리 3세는 샤를르 9세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왕으로서 통치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고 왕처럼 보이며 행세하는 일에 더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앙리의 주위에는 언제나 핸섬한 남자들이 넘쳐 있었다. 앙리는 오늘날에 보면 마치 게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친구들이란 남자들과 노는 것도 어린아이와 같았다. 이런 상황이 카테리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른다. 왕을 대신하여 권력을 유감없이 행사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앙리 3세와 미뇽들. 미뇽이란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들을 뜻한다. 앙리는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는 짓도 어린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그래도 결혼은 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앙리 3세는 어머니 카테리나의 바램에 반하여서 평민과 결혼하였다. 카테리나는 앙리가 다른 나라 왕실의 공주 중에서 결혼하기를 바랬다. 그런데 앙리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앙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얘기가 나돌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루아 왕조의 사람들에게서는 후사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프란시스 2세도 후사가 없었고 샤를르 9세에게도 후사가 없었다. 그리고 앙리 3세에게도 후사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카테리나에게는 앙리 다음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앙주의 프란시스였다. 그런에 앙주의 프란시스는 왕실과 어머니 카테리나의 의사에 반하여 위그노를 추종하였다. 그러므로 다음 왕위 계승자로서 자격이 되지 못하였다. 앙주의 프란시스는 평소에 카테리나와 앙리 3세에게 위그노와 타협하라고 요청했었다. 하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앙주의 프란시스는 젊은 나이인 29세에 세상을 떠났다. 폐염이었다. 앙리 3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고 남동생 프란시스는 위그노이기 때문에 왕이 될수 없었으며 당시의 법은 남자만이 왕위를 계승할수 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카테리나의 둘째 딸 마가렛의 남편인 나바레의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마가렛은 결혼후에 스캔들이 무성하여서 일찍부터 남편 앙리의 눈밖에 났기 때문에 앙리가 프랑스 왕을 겸하게 되자 마가렛의 친정사람들, 특히 카테리나는 점차 찬반신세가 되지 않을수 없었다.


마르가레트(마가렛) 드 발루아. 마가렛, 애칭은 마르고. 나바레의 왕비. 결혼 후에 외간남자와의 섬싱이 뜨거워서 남편의 눈밖에 났다.


로마가톨릭의 프랑스에 위그노 신도가 왕이 되었으니 반발이 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바레의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을 겸하고 나서부터 파리의 거리에서는 폭동수준의 앙리 반대 시위가 연일 있었다. 앙리를 반대하며 위그노를 반대하는 시위였다. 파리 시민들은 앙리가 프랑스의 왕이 되고 나서 가혹한 정치를 하고 있다면서 항의하였다. 그러나 앙리는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우선 카테리나가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다시 말해서 카테리나가 가지고 있던 모든 직위로부터 파면하였다. 그때 카테리나는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회복하고 있던 때였다. 이어서 그는 정적이라고 생각되는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들어갔다. 프랑스는 바야흐로 내란의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의 시기 중에도 새해가 밝아서 1589년이 되었다. 새해 벽두인 1월 5일에 카테리나 모후가 세상을 떠났다. 늑막염이 도져서였다. 파리는 여전히 카테리나의 적인 위그노가 장악하고 있는 때였다. 카테리나의 시신은 발루아 왕가의 멤버들이 매장되는 전통적인 영묘에 매장되지 못하였다. 임시로 보관되고 있던 카테리나의 유해가 파리의 생드니 교회로 옮겨진 것은 1년이나 지나서였다. 그러나 카테리나의 사후는 평안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의 프랑스 혁명기간 중에 어떤 폭도가 생드니에 있는 카테리나의 석관을 열어서 유골들을 모아 어떤 공동묘지에 다른 왕과 왕비들의 유골들과 함께 버렸다. 그로부터 카테리나의 석관은 비어 있게 되었고 진짜 유골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파리의 생드니 성당에 있는 앙리 2세와 카테리느의 석관


카테리나는 대단한 예술애호가이며 후원자였다. 아마 메디치 가문으로부터의 내력이기도 했지만 실은 자신이 예술애호가라는 선전을 위해서였다는 얘기다. 카테리나는 아들들이 프랑스의 국왕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치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많은 예술작품들을 제작토록 했다. 결과, 발루아 왕조의 카테리나 시기에 많은 미술작품들이 만들어져 후세에게 전해졌다. 카테리나는 미술작품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궁정에서의 여러 초대형 축제들도 개최하여 발루아 왕가의 명성을 드높이도록 했다. 축제에서는 주로 연극 공연, 음악 연주, 무도회 등으로 진행되었다. 카테리나가 주도한 발레 공연은 훗날 정통성을 지닌 프랑스 발레로 발전하는데 기여한 것이었다. 카테리나는 건축에도 대단한 관심이 있었다. 카테리나는 남편 앙리 2세가 정부인 마담 뿌아티에에게 샤토 드 슈농소를 선물로 주었을 때 그런 아름다운 건축물이 자기의 손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여인의 손에 들어간 것을 대단히 애석해 했다. 이처럼 건축에 관심이 깊었던 카테리나는 궁전들과 저택들을 여러 채 짓도록 했다. 그리고 건물마다 카테리나의 사랑과 슬픔을 표현한 문장(앙블렘)을 조각하여 넣도록 했다.


아름다운 샤토 드 슈농소


카테리나는 결혼후 10년이 넘게 임신하지 못하였다. 그러다보니 임신하기 위해서 별별 비술을 다 섭렵했다는 소문이었다.  또한 권력의 잡고 있을 때에는 성바르톨로뮤 대학살의 음모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결국 그가 비술과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넘쳐 있었다. 실제로 카테리나는 마법사들이나 점성술사들을 궁전에 초대하여 모임을 갖는 일이 많았다. 강신술사들도 초청해서 들어오게 했다고 한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심령술사 겸 예언자인 노스트라다무스도 카테리나의 초청을 받아 자주 궁전에 들어와서 지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종교적으로 분쟁이 격화되어 있었고 또한 마녀 사냥이 성행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카테리나가 비술을 행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일이었다. 하지만 카테리나에 대하여 어느 누구 한사람 마녀라고 비난하며 고소하는 사람은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와의 연결도 카테리나가 점성술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관심이 깊기 때문에 의견을 나누었을 뿐이라는 설명으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스트라다무스. 카테리나와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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