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카테리나와 메디치 가문

정준극 2018. 6. 29. 20:50

카테리나와 메디치 가문

메디치, 넌 누구니?


메디치 가문의 본고장인 플로렌스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이다. 메디치 가문이라고 하면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으로 플로렌스를 통치한 가문이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 예술을 애호한 가문으로 더 널리 알려진 명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플로렌스 공국을 통치하였고 유럽의 내노라하는 왕실이나 귀족 집안과 인연을 맺고 살게 된 배경은 간단히 말해서 막대한 재력 때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플로렌스에서 처음에는 모직 무역으로 돈을 벌었고 이어 은행을 운영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못하는 일이 없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돌이켜보아서 메디치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인물은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 부터였다. 실상 메디치 사람들은 원래 투스카니의 무겔로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플로렌스로 이사를 왔고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코시모에 이르러서 은행업으로 크게 성공해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가문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재력을 이용해서 예술, 교육, 건축 분야의 대후원자가 되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사실상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메디치 가문을 바롯한 이탈리아의 명문 몇몇 가문이 주도하여 이룩한 것이다. 메디치와 함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꽃피운 가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Visconti)와 스포르차(Sforza)가문, 페라라의 에스테(Este) 가문, 만투아의 곤사가(Gonzaga) 가문 등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문화와 예술이 융성했던 황금시기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는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위의 그림은 오타비오 바니니의 작품으로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가 목신인 파운(Faun)의 흉상을 고고 감탄하는 장면이다.


메디치 가문은 세명의 교황을 배출하였다. 교황 레오 10세(1513-1521), 클레멘트 7세(1523-1534), 레오 11세(1605)이다. 그리고 두명의 프랑스 섭정을 배출하였다. 카테리나(캬트린: 1523-1559)와 마리(1600-1610)이다. 두 여인은 왕비였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계승한 어린 아들들을 대신하여 섭정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메디치 가문은 평민 가문이었으나 1523년에 플로렌스의 공작 가문이 되었다. 메디치가 플로렌스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있을 때인 1569년에  플로렌스공국(Duchy of Florence)은 투스카니대공국(Grand Duchy of Tuscany)으로 확장되었다. 메디치는 1569년부터 1737년까지 거의 2백년을 투스카니대공국을 통치하였다. 메데치 가문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로렌초 2세이다. 카테리나의 아버지이다.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것은 18세기 초에 메디치은행이 파산되어서였다. 카테리나의 아버지인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92-1519)는 1516년부터 151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플로렌스를 통치하였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는 적자로서 딸 하나밖에 없었다. 그가 나중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카테리나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는 사생아로서 아들 하나가 있었다.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이다. 알레산드로가 플로렌스 공국의 첫번째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알레산드로의 어머니는 흑인으로 알려져있다. 메디치가 로마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에 시모네타 다 콜레베키오라는 흑인 하녀가 아들을 낳았다. 나중에 카테리나의 아버지 로렌초는 흑인 하녀가 낳은 아들이 자기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다. 알레산드로이다. 그로부터 9년 후에 로렌초가 세상을 떠났다. 알레산드로는 사생아이긴 하지만 로렌초가 아들로서 인정했기 때문에 1531년에 플로렌스의 첫번째 세습 군주가 되었다. 로렌초는 플로렌스의 정부를 콘트롤하던 삼촌 줄리아노의 뒤를 이어 1513년에 플로렌스의 군주가 되었다.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어머니가 흑인이어서 흑인의 유전자가 나타나 있는 모습이다.


로렌초는 야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로렌초는 플로렌스공화국의 정부 시스템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는 한편, 그는 24세 때에 삼촌인 교황 레오 10세를 설득하여서 우르비노(Urbino)의 공작이 되었다.  우르비노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페사로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세부터의 고도여서 유네스코는 우르비노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아무튼 로렌초가 우르비노의 통치자로 임명되자 원래 우르비노를 통치했던 델라 로베레 가문을 위시해서 우르비노 유지들의 반발이 거셌다. 로렌초는 1만이나 되는 교황청 군대를 동원하여 우르비노를 점령코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는 중에 로렌초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로렌초는 투스카니로 일단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517년 9월에 우르비노와의 조약을 맺고 우르비노를 되차지하였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우르비노를 콘트롤 한 것은 겨우 2년 뿐이었다. 로렌초가 1519년에 세상을 떠나자 우르비노는 원래 우르비노를 통치했던 델라 로베레 가문으로 넘어갔다. 한편, 로렌초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518년에 뜻한바 있어서 오베르뉴 백작의 딸인 마델레이느 드 라 투르()와 결혼하였다. 그때 로렌초는 27세였고 신부인 마델레이느는 20세였다. 이듬해에 딸 카테리나가 태어났다. 카테리나가 태어난지 3주 후에 아버지 로렌초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27세였다. 이어서 어머니 마델레이느도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카테리나는 태어난지 두어달 만에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었다. 카테리나는 메디치 교황인 레오 10세와 클레멘트 7세의 보호아래 자랐다. 로렌초 2세로 알려진 로렌초의 묘는 플로렌스의 산로렌초 교회의 메디치 카펠레(예배처)에 있다. 로렌초의 관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펜시에로소(Pensieroso: 생각하는 사람)로 장식되어 있다. 로렌초 공작을 표현한 조각이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또 하나의 펜시에로소가 있다. 로렌초의 묘소를 장식한 펜시에로소와 파트너라고 할수 있는 작품이다. 또 다른 펜시에로소는 로렌초의 삼촌인 줄리아노(Giuliano di Lorenzo de' Medici)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산로렌초 교회에 있는 묘소가 혹시 '위대한 로렌초'(Lorenzo di Magnifico)의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다.


플로렌스의 산로렌초교회의 메디치 채플에 있는 로렌초 2세의 묘소.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펜시에로소이다.


카테리나의 어머니는 마델레이느 드 라 투르 도베르뉴(Madeleine de la Tour d'Auvergne: 1498-1519)이다. 오베르뉴 백작인 장 드 라 투르의 막내 딸이다.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이탈리아에서의 세력확보를 위해 모종의 전략을 구상하였다. 프란시스의 속셈은 실은 교황과 손을 잡고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황제를 견제하자는 것이었다. 아무튼 1515년 12월에 프란시스 1세는 교황 레오 10세와 만나서 친선협정을 채결하였다. 이 협정에서 프란시스는 프랑스의 가톨릭 교회에서 바티칸의 권한을 보장하겠다고 했고 반면에 교황은 프란시스가 나폴리 왕국도 통치할수 있도록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외교협정에는 당시의 일반적인 외교협정에서 볼수 있는 대로 부수조치로서 결혼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었다. 결혼으로서 동맹을 공고히 한다는 목적이다. 교황 레오 10세의 조카인 메디치의 로렌초가 1516년에 플로렌스 공화국의 리더가 되었다. 프랑스의 프란시스는 로렌초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면서 자기의 친척 중에서 아름답고 품위있는 여인 하나를 소개하겠으니 결혼을 하게 되면 양국간의 친선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란시스가 추천한 아름답고 품위있는 여인은 그의 먼 친척으로서 매우 부유한 집안의 마델레이느였다. 로렌초는 프랑스의 왕가와 연결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그러한 청혼을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였다. 로렌초는 사실상 왕족이 아니고 장사나 하던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실 여인과 결혼한다는 것은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그런가하면 마델레이느 쪽으로보면 교황과 연계된다는 것이 한없는 영광이었기에 로렌초와의 결혼을 적극 환영하였다.


 메디치의 로렌초 2세와 마델레이느 드 라 투르. 카테리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마델레이느 드 라 투르 도베르뉴와 메디치의 로렌초 2세의 결혼식은 1518년 5월 5일 날씨도 좋은데 파리의 서남쪽 투르 인근에 있는 앙부아즈의 샤토 당부아스(Chateau d'Amboise)에서 거행되었다. 마침 프란시스 1세에게 왕자가 태어났다. 로렌초와 마델레이느의 결혼식은 구 가문을 빛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어서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왕실에서 무슨 행사가 열리면 여흥으로 무도회를 갖는 것이 관례였다. 이날의 결혼식 후에도 화려한 무도회가 열렸다. 신랑이 이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춤들을 추었다. 72명의 귀부인들이 이탈리아 여인, 독일 여인, 프랑스 여인으로 분장하여 춤을 추었다. 고급 비단 드레스에 찬란한 장신구의 여인들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마델레이느에게 결혼축하금으로 1만개의 금화를 주었다. 로렌초는 프랑스의 왕족들과 주요 귀족들에게 모두 값비싼 선물을 하였다. 로렌초는 결혼식을 올린지 꼭 1년에서 하루 빠지는 1519년 5월4일 세상을 떠났다. 마델레이느는 남편 로렌초보다 며칠 앞선 4월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흑사병에 감염되어서라고 하지만 혹자는 남편 로렌초의 매독으로부터 감염되어서였다고 주장했다. 마델레이느는 세상을 떠나기 2주일 전에 카테리나를 출산하였다. 카테리나가 태어났을 때에 로렌초와 마델레이느는 마치 아들을 낳은 것처럼 기뻐했다고 한다. 마델레이느의 아버지는 오베르뉴 백작인 장 3세였다. 장 2세는 1501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10년 후인 1511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마델레이느가 로렌초와 결혼할 때에는 친정 부모가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었다. 마델레이느에게는 언니가 한 사람 있었다. 안느였다.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막대한 재산은 두 딸에게 상속되었다. 마델레이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에게 상속된 모드 영지는 유일한 딸인 메디치의 카테리나에게 상속되었다. 그리고 카테리나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자 어머니로부터 상속받은 모든 재산은 프랑스 왕실의 재산이 되었다.


루아르 강변에 있는 샤토 당부아스. 로렌초와 마델레이느의 결혼식이 거행된 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