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샤를르 9세와 성바르톨로뮤 대학살

정준극 2018. 7. 5. 12:13

샤를르 9세와 성바르톨로뮤 대학살

그리고 합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공주


샤를르 9세. 메디치의 카테리나의 아들이다.


샤를르가 형 프란시스 뒤를 이어 프랑스의 국왕으로 대관식을 가질 때에 아홉살이었다. 혹자는 열살이라고 하지만 정확히는 아홉살이었다. 아홉살 짜리 아이가 무얼 알겠는가? 샤를르는 대관식에서 겁이 났는지 또는 두려웠는지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 카네티라는 그런 샤를르를 곁에 두고 하나하나 보살펴 주었다. 심지어 밤에는 샤를르가 혼자 자는 것이 무섭다고해서 카테리나가 샤를르의 방에 가서 자장가를 불러주며 재워주어야 했다. 이후 카테리나는 왕을 대신해서 모든 회의를 주관했고 정책을 결정했으며 국사를 관장하였다. 그렇다고 카테리나가 프랑스 전국에 걸친 통치권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아니다. 한계가 있었다. 사실상 프랑스의 여러 지방은 귀족들이 영지로서 통치하였다. 중앙 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케이스였다. 영주들은 프랑스의 왕관을 누가 썼는지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자기의 영토만 잘 간수하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귀족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부의 정치에 무관할수 없다는 귀족들도 상당히 있었다. 카테리나가 당면한 도전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었다. 카테리나는 어쨋든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신구교간의 갈등이었다. 로마가톨릭과 위그노와의 갈등이었다.


메디치의 카테리나


카테리나는 신구교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 지도자들을 불러 뿌아시(Poissy)에서 회합을 가졌다. 카테리나는 교리에서부터의 차이를 해소코자 했다. 카테리나는 로마가톨릭과 위그노가 서로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1561년 10월에 카테리나가 소집한 회의는 실패였다. 신구교의 참석자들은 회의를 소집한 카테리나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폐회할 정도였다. 어째서 회의가 실패했을까? 카테리나가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만 해결코자 했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카테리나는 뿌아시 회의가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가톨릭과 위그노의 화해를 위한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 중에 하나가 1562년 1월에 발표한 '생제르맹 칙령'(Edict of St Germain)이었다. 내용은 결국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므로 교리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서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중에 그해 3월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시 대학살'(Massacre of Vassy)라는 사건이었다. 평소에 위그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기스의 공작이 바시의 어떤 창고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위그노들을 공격하여 74명을 죽이고 104명에게 부상을 입한 큰 사건이었다. 대학살이 일어난 후에 기스 공작은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이라고 말했지만 사건이 일어난 후 파리에 입성하였을 때에는 파리시민들이 연도에 나와서 영웅이라고 찬사를 퍼부을 정도였다. 비운의 위그노들은 복수를 다짐했다. 바시의 대학살은 결과적으로 '프랑스종교전쟁'(1562-1598)의 불길을 지펴준 것이었다. 바시 대학살 이후 프랑스는 30 여년에 걸친 내란성격의 혼란에 빠져 있어야 했다.  


바시 대학살


바시 대학살이 일어난지 약 한달후, 부르봉의 루이는 갸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과 함께 1천 8백의 군사를 조성했다. 부르봉의 루이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브리타뉴 지방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의 마을들을 하나 둘씩 점령해 나갔다. 카테리나가 평화를 위해 콜리니 제독을 별도로 만났다. 콜리니 제독은 휴전을 거부했다. 그러자 카테리나는 '좋습니다. 군대를 앞세우고 있으니 우리도 우리 군대를 보여주겠소'라고 말했다. 한번 붙어보자는 포고였다. 국왕의 군대는 재빨리 전선에 배치되었고 우선 위그노가 점거하고 있는 루앙을 포위하였다. 나바라의 왕인 부르봉의 안투안은 전투에 나갔다가 화승총을 맞아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카테리나는 전선에 가서 그런 안투안 왕을 만나겠다고 주장했다. 신하들이 위험하니 그만 두라고 당부하자 '나의 용기는 그대들의 용기처럼 대단하니 걱정마시오'라며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안투안 왕을 만나서 위로를 하고 돌아왔다. 국왕의 군대는 루앙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승리는 길지 않았다. 1563년 2월에 어떤 스파이가 오를레앙을 공성하고 있는 기스 공작을 뒤에서 화승총을 쏘아 죽이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간의 해묵은 원한관계로 인한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지만 당장은 평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카테리나의 평화칙령 또는 앙부아스 칙령은 1563년 3월에 선포되었고 이에 따라 위그노와 가톨릭의 전투는 일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카테리나는 위그노와 가톨릭의 군대를 연합하여서 영국이 점거하고 있는 르 아브르(Le Havre)를 탈환하기 위한 액션에 들어갔다.


오늘날의 루앙


1563년 8월에 루앙에서 열린 의회는 이제 샤를르 9세가 13세가 되었으므로 국정을 수행해도 문제가 없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샤를르는 아직 국사를 돌본 능력이 되지 못했으며 더구나 정부의 일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모든 신하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함께 카테리나는 로마가톨릭과 위그노의 평화를 위해 나바라 왕국의 위그노 실세 왕비인 잔느 달브레(Jeanne d'Abret)를 만나 화해의 제스추어를 보여주었다. 잔느 달브레는 안투안 드 부르봉의 왕비이다. 그러는 중에 1567년 9월에 위그노가 프랑스 궁전을 장악가호 반개신교 귀족들을 궁정으로부터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1차 종교전쟁(1562-63)이 끝나자 어린 샤를르 9세가 이제 성년이 되었으므로 국사를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선언이 있었다. 하지만 샤를르 9세의 궁정은 기스의 형제들이 지배하게 되ㅐ었다. 기스의 공작인 앙리가 주동이 되었다. 개신교 위그노는 가톨릭인 기스의 권세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카테리나가 주도한 앙부아스 칙령의 내용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한편, 위그노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합작하여서 두 나라의 국경지대에 있는 이단들을 모조리 파괴하려 한다는 소문을 믿었다. 국경지대의 이단들이란 나바라 왕국의 위그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위그노와 국왕 군대와의 전투는 이듬해 3월 롱주모 평화협정으로 일단 막을 내리기는 했다. 하지만 사회의 혼란과 피흘리는 전투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위그노의 궁정 습격 사건이후 카테리나의 위그노에 대한 정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카테리나는 관용이나 타협정책을 포기했다. 카테리나는 위그노로부터 기대할수 있는 것은 기만뿐이라고 말했고 또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인 알바공작이 강압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라고 찬양했다. 알바공작은 네덜란드에서 가톨릭을 반대하는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스페인에 항거하는 애국지사들 수천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일이 있는 잔혹한 인물이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인 알바공작의 독재를 비유한 그림. 네덜란드의 귀족들이 자비를 구하지만 알바 공작은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위그노는 프랑스 서해안의 라 로셀르(La Rochelle)요새로 일단 후퇴하였다. 잔느 달베르와 그의 15세난 아들인 부르봉의 앙리가 전선에 합류하였다.잔느 달베르는 카테리나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는 죽을 결심이 되어 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느니 모두 죽을 결심이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 잔느에 대하여 카테리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모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라고 말하며 비난했다. 카테리나로서는 잔느의 결심이 발루아 왕조에 위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나는 잔느와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 앙 라이(St-Germain-en-Laye)에서 였다. 왜냐하면 카테리나의 왕정 군대는 군비가 바닥이 났기 때문이었다. 카테리나는 하는 수없이 위그노에게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어서 양보해야 했다. 카테리나는 발루아 왕조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결혼정책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우선 신성로마제국과의 결혼정책이었다. 1570년에 샤를르 9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카테리나는 또한 자기의 아들 두명 중에서 하나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시키려고 불철주야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저 유명한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볼레인의 유일한 딸로서 블라디 메리의 뒤를 이어 영국 여왕이 된 사람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한편 카테리나는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한 큰 딸 엘리자베스가 결혼 1년만에 출산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막내딸 마가렛을 필립 2세와 재혼시키려고 주선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자 카테리나는 막내 딸 마가렛을 나바라의 앙리 3세와 결혼시키고자 했다. 나바라의 앙리 3세는 잔느 달베르의 아들이었다. 카테리나의 속셈은 원수처럼 적대해 온 나바라의 부르봉과 결혼으로 연합하므로서 발루아를 보장 받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되느라고 마가렛은 어느 틈인지 기스 공작의 아들인 기스 의 앙리와 비밀리에 사랑하는 사이였다. 카테리나는 그 사실을 알자 분을 참지 못하여서 마가렛이 잠들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서 때리고 잠옷을 찟고 머리칼을 한움큼이나 쥐어 뽑았다고 한다.


카테리나의 막내딸인 마가렛 드 발루아. 나바라의 앙리와 결혼하였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카테리나는 막내 딸 마가렛의 문제가 어느정도 진정되자 나바라의 앙리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였다. 우선 앙리의 어머니인 잔느와 합의가 되어야 했다. 카테리나는 잔느에게 연락하여 파리로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잔느의 아이들도 보고 싶으니 같이 오라고 했다. 카테리나는 잔느에게 파리방문의 안전을 보장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덧붙여 말했다. 잔느가 '웃기지 마십시오. 무슨 구실을 잡아서 나를 궁지로 몰아 넣으려 하십니까? 그리고 아이들도 보고싶다구요? 나는 당신께서 어린 아이들도 잡아 먹는지 몰랐습니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카테리나의 영을 거약하기에는 나바라의 힘이 부족하였다. 잔느는 어쩔수 없이 파리로 올라갔다. 카테리나는 잔느를 이런 저런 모양으로 못살게 굴었다. 결국 잔느는 아들 앙리와 마가렛의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수 없었다.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아무리 앙리가 가톨릭의 마가렛과 결혼한다고 해도 위그노 신앙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다는 것이었다. 잔느는 일단 나바라로 돌아갔다가 결혼식에 사용할 의상들을 사기 위해서 다시 파리로 올라왔다. 그러다가 파리에서 뜻하지 아니한 병에 걸려 1572년 6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잔느의 나이는 43세였다. 위그노들은 카테리나가 독약을 써서 잔느를 살해했다고 비난했지만 근거는 없었다. 앙리와 마가렛의 결혼식은 그해 8월 18일 노트르담에서 거행되었다. 카테리나가 과연 발루아와 부르봉의 결혼으로 이득을 본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 발루아의 대가 끊어지자 부르봉이 프랑스의 왕이 되었을 뿐이다.


  

잔느 달베르와 나바라의 앙리 2세, 그리고 프랑스의 앙리 3세


나바라의 앙리와 발루아의 마가렛이 결혼식을 올린지 사흘 후의 일이었다. 프랑스 종교전쟁 당시에 위그노의 리더였던 콜리니 제독이 루브르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고 콜리니 제독은 팔에 상처를 입었다. 어떤 집의 창문에서 총을 쏘고 난 후의 연기가 보였다. 콜리니 제목의 수하들이 급히 그 건물로 뛰어 들어갔으나 범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말을 타고 도주하였다. 콜리니 제독은 곧바로 숙소인 오텔 드 베티시로 옮겨졌고 의사는 팔에서 탄환 하나를 빼냈다. 그러나 손가락도 총알이 관통했기 때문에 손가락 하나를 절단해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카테리나는 콜리니 제독을 찾아가서 반드시 범인을 잡아서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훗날 역사학자들은 콜리니 제독을 습격한 배후에는 카테리나가 있었다는 주장을 했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카테리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들은 기스 가문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범인이 총을 쏜 건물이 기스가의 소유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스페인의 교황청 대표단이 콜리니 제독의 왕에 대한 영향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내세웠다. 누가 그랬는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끔찍한 유혈사태였다. 그 유혈사태는 카테리나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콘트롤 할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파리 루브르의 개신교 기도처에 있는 갸스파르 드 콜리니 제목 기념상. 1572년 8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콜리니 제독에 대한 암살시도가 있은지 이틀후에 저 유명한 성바르톨로메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카테리나의 명성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대사건이었다. 8월 23일에 샤를르 9세는 파리의 위그노들을 모조리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샤를르 9세는 '모두 죽이시오, 모두'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그때 파리에는 나바라에서 온 위그노들과 지방에서 올라온 위그노들이 결혼식이 끝났지만 아직 돌아가지 않고 머물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샤를르 9세의 그런 명령의 배경에는 카테리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어째서 그런 명령이 떨어졌을까? 카테리나와 신하들은 위그노들이 콜리니 제독에 대한 습격을 복수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미리 방비하느라고 그런 엄청난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8월 24일에 기스가의 사람들이 콜리니 제독이 묵고 있는 집을 찾아가서 그를 살해하였다. 이를 기화로 가톨릭들은 위그노들을 색출하여 학살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날은 성바르톨로메 축일이었다. 파리에서의 학살은 거의 1주일이나 지속되었다. 위그노 학살은 지방으로도 번졌다. 지방에서의 학살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계속되었다. 9월 29일에 마침내 나바라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의 학살을 방지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서약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카테리나는 궁정에 모인 대사들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렇듯 위그노에 대한 대학살을 마치 게임처럼 즐겼고 위그노들이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에 웃음을 터트리자 그로부터 카테리나에게 사탄이 함께 했다는 전설이 시작되었다. 훗날 위그노 작가들은 카테리나를 음모꾼의 이탈리아 여인이라고 낙인찍었으며 마키아벨리가 주장한 '한 번에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론을 실행했다고 말했다.


성바르톨로메 대학살이 일어난 날의 아침의 루브르. 샤를르 9세와 궁전 사람들. 모두들 궁금한듯 창밖을 내다 보고 있다. 알프레드 바론 클레이 작.


[샤를르 9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공주]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Elisabeth of Austria: 1554-1592)는 합스부르크의 공주이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군주)인 막시밀리안 2세이며 어머니는 스페인의 마리아 공주였다. 엘리자베트는 어린 시절에 비엔나 중심지역에 있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소인 슐로스 슈탈부르크(Schloss Stallburg)에서 언니 안나와 남동생 마티아스와 함께 자랐다. 슐로스 슈탈부르크는 나중에 스페인승마학교와 마사로 사용된 곳이다. 엘리자베트가 다섯살이 되자 장차 프랑스의 왕이 되는 샤를르 9세와의 혼담이 처음으로 오고갔다. 그로부터 3년후에 프랑스 사절단이 비엔나를 방문하여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그때 엘리자베트는 8세였다. 프랑스 사절단장은 어린 엘리자베트를 보고 '이 분이 프랑스의 왕비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프랑스와의 혼담을 주도한 사람은 엘리자베트의 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1세 황제였다. 샤를르 9세의 어머니인 메디치의 카테리나(캬트린)도 이 결혼을 흔쾌히 추진하였다. 로마가톨릭인 오스트리아와 결혼으로 유대를 맺어서 개신교의 발호를 저지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보다고 합스부르크와 연맹이 되어 프랑스의 왕권을 굳건히 다지자는 의도가 더 컸다.


비엔나 호프부르크에 연계되어 있는 슈탈부르크. 엘리자베트가 어릴 때에 지낸 곳이다.


엘리자베트의 대리인과의 결혼식은 1570년, 그러니까 엘리자베트가 16세일때에 독일의 슈파이어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샤를르를 대신한 신랑은 엘리자베트의 삼촌으로 원지(Further) 오스트리아-티롤의 페르디난트 대공이었다. 대리 결혼식을 옛날에 신부가 시집으로 가기 전에 신부집에서 의례적으로 올리는 결혼식이다. 특히 왕족들간의 결혼에 있어서는 당연한 관례로 지켜내려오던 의식이다. 대리결혼식후에 축하 연회가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그후 엘리자베트는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로 가는 길은 마침 예상치 못한 장대비 때문에 길이 엉망이었다. 엘리자베트 측은 사람을 파리로 보내어서 날씨가 나빠서 여행을 계속하기가 힘이 드니 미안하지만 국경지대에 있는 메치에레 장 샴파뉴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리하여 당시 20세의 샤를르가 국경지대까지 와서 1570년 11월 26일에 엘리자베트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파리에서의 결혼 축하 행사는 날씨 탓 등등의 이유로 이듬해 봄으로 연기되었다. 엘리자베트와 샤를르의 결혼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가 한 식구가 되는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파리에서의 축하행사는 그야말로 경비가 아깝지 않게 성대하게 거행되었고 그 후에 엘리자베트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오늘날의 슈파이어대성당. 엘리자베트가 대리결혼식을 올린 성당이다.


엘리자베트는 신랑 샤를르가 생기기도 그럴듯하게 생기고 더구나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단번에 프랑스라는 대국의 왕비가 되는 것이므로 샤를르가 좋아서 처음 만나는 때에 사람들 앞에서 먼저 키스까지 했다. 그러나 샤를르 9세에게는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정부가 있었다. 마리 투셰라는 여인이었다. 마리 투셰는 샤를르가 엘리자베트와 결혼식을 올리자 '저 독일 소녀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 두고 보아라'라고 말했다. 샤를르는 엘리자베트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며칠 동안은 풋풋한 엘리자베트에게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리운 정부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배후에는 샤를르의 어머니 카테리나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카테리나는 엘리자베트가 혹시나 프랑스의 국정에 이러쿵 저러쿵 간섭할 것 같아서 그런 일을 처음부터 견제하기 위해 엘리자베트를 일부러 소박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한편, 샤를르는 그래도 자기를 믿고 시집 온 엘리자베트인데 너무 소홀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특히 프랑스 궁정은 사치스럽고 난잡하기까지 한데 경건하고 신실한 가톨릭 우선가정에서 자란 엘리자베트가 쇼크를 먹지나 않을지 걱정했다. 그리고 시어머니인 카테리나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엘리자베트를 보호해 주느라고 노력했다. 그러면 엘리자베트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프랑스 궁정의 방종하고 난잡한 생활에 정말로 쇼크를 먹었다. 그래서 수를 놓거나 책을 읽거나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자선활동에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교회에서나 궁전에서나 온전히 기도생활에 힘썼다. 엘리자베트는 하루에 두번이나 미사에 참석하였다.


막시밀리안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딸로 태어난 엘리자베트


로마가톨릭인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에서의 개신교 활동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572년 8월 24일부터 시작된 성바르톨로뮤 대학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어찌하여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끔찍하고 흉폭한 행동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수 없었다. 대학살이 벌어진 다음날 아침, 엘리자베트는 남편인 샤를르에게 대학살에 대하여 미리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내가 주도한 사람이라오'였다. 엘리자베트는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서 그를 위해 기도하겠고 그의 영혼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달후인 1572년 10월 27일에 왕비는 그렇게도 바라던 자녀를 출산하였다. 딸이었다. 그럴 즈음에 샤를르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샤를르는 거의 1년 반동안 병석에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가 1574년 5월 30일 불귀의 객이 되었다. 엘리자베트는 남편 샤를르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렇게도 슬프고 그렇게도 진지하게 소리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샤를르가 세상을 떠나자 카테리나의 조치가 뒤따랐다. 먼저 한 일은 왕비였던 엘리자베트를 샤를르의 방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당시의 관례로는 유가족들이 40일간 애도기간을 가졌다. 엘리자베트는 궁전에서 40일간의 애도기간을 가진후 친정 아버지 막시밀리안 황제가 파리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비엔나로 돌아오라고 하는 바람에 비엔나로 떠났다. 딸 마리는 카테리나의 손에서 자라야했다.


엘리자베트 왕비가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인근에 세운 수녀원. '왕비수녀원'이라고 불렀다. 1740년도의 모습


이듬해인 1575년 8월에 엘리자베트는 어린 마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파리를 찾아가서 잠시 딸을 만나볼수 있었다. 그후로 엘리자베트는 다시는 딸 마리를 보지 못했다. 어린 딸 마리는 3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도 죽고 딸도 죽어서 아무도 없게 된 엘리자베트는 오로지 신앙으로 나날을 견디며 지냈다.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의 부르제에 예수회대학을 설립했다. 엘리자베트는 1580년에 비엔나의 슈탈부르크 인근에 땅을 사서 수녀원을 세웠다. '가난한 클라레스 수녀원' 또는 '왕비수녀원'이라고 불렀다. 엘리자베트는 평생을  수녀원의 수호성인인 클라레를 본받는 경건한 생활을 했다. 평생이라고 해야 안타까운 38년이었다. 엘리자베트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헌신했다. 엘리자베트는 1592년에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트의 시신은 '가난한 클라레스 수녀원'의 예배처에 소박하게 안치되었다. 엘리자베트는 유언으로 그의 남은 재산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위해 쓰도록 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먼저 세상 떠난 남편 샤를르와 딸 마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사용해 달라고 말했다.

 

1구 도로테어가쎄 18번지의 루터교회(Lutherische Stadtkirche). 과거에 엘리자베트 왕비가 세운 수녀원이 이곳에 있었다. 수녀원은 '천사의 여왕 마리아, 클라리스수녀원'(Klarissinenkloster Maria, Konigin der Engel) 또는 '왕비 수녀원'(Koniginkloster)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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