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모후 카테리나

정준극 2018. 7. 3. 20:29

모후 카테리나


모후 카테리나. 커다란 진주로 수놓은 의상을 보라. 얼마나 화려한가를!


유럽의 역사에 있어서 아들 세명이 모두 왕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모후가 된 여인은 메디치의 카테리나가 유일할 것이다. 16세기에 그의 아들 셋이 모두 프랑스의 왕이 되었던 것이다. 우선 카테리나의 큰아들 프란시스가 프란시스 2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1547년의 일이었다. 그때 프란시스 2세는 고작 15세였다. 그러나 프란시스 2세는 재위 1년 만에 병사했다. 그 1년 동안 프랑스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프란시스 2세를 축출코자는 쿠테타가 일어났던 것이다. 코테타의 주동자들은 명문 귀족 집안인 기스가(Maison de Guise)의 형제들로서 로레인의 추기경과 기스 공작인 앙리였다. 그나저나 이들 형제가 누군가하면 이들의 조카인 메리가 스코틀랜드의 여왕인데 1년 전에 프란시스와 결혼한 사이였다. 이들 형제는 자기들의 조카가 프랑스의 새로운 왕이 될 프란시스의 부인인 것을 기화로 선왕인 앙리 2세, 즉 카테리나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다음날부터 목에 힘을 주고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린 프란시스와 메리를 데리고 재빨리 루브르 궁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프란시스가 어린 것을 핑게로 마치 자기들이 왕인듯 권세를 행세하였다. 그때에 모후 카테리나는 필요에 의해서 기스가의 형제들과 손을 잡아야 했다. 사실상 카테리나는 프랑스 정부에서 이렇다할 역할이 없었다. 왜냐하면 중신들은 프란시스가 비록 15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국왕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스는 어머니 카테리나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칙령을 내리더라도 서두에 '짐의 어머니이신 모후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 모든 사항들을 지시하노니...'라고 시작했다. 카테리나는 비록 기스 형제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여러 사정으로 이들과 협력하지 않을수 없지만 그래도 모후로서 점치 자기가 할 일을 챙겨나가기 시작했다. 카테리나가 우선 취한 조치는 세상 떠난 남편 앙리 2세의 오랜 정부로서 프랑스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던 마담 뿌아티에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카테리나는 마담 뿌아티에에게 앙리 2세가 선물로 준 프랑스의 보석들과 샤토 드 슈농소를 정부에 반환하라고 지시했다. 카테리나는 나중에 마담 뿌아티에가 샤토 드 슈농소를 고치고 치장한 모든 것을 갈아치우고 새롭게 단장했다.


샤토 드 슈농소의 침실. 카테리나는 마담 뿌아티에가 고치고 장식한 모든 것을 새로 바꾸었다.


기스가의 형제들은 로마가톨릭이기 때문에 개신교를 박해하고 싶어했다. 기스가의 형제들, 즉 로렌이 추기경과 기스공작인 앙리는 자기들의 조카 사위가 되는 프란시스 2세가 프랑스의 왕이 되기는 했지만 1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나바라(나바르) 왕국의 루이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프랑스 왕위에 도전하자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여서 어떤 대응조치를 생각했다. 나바라는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의 사이에 있는 피레네 산맥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왕국이었다. 현재의 바스크 지방 대부분이 나바라 왕국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는 팜플로나였다. 그래서 나바라 왕국을 팜플로나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바라 왕국은 부르봉 왕가가 대대로 왕위에 있었다. 그런데 나바라 왕국은 로마가톨릭을 배척하고 개신교인 위그노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프랑스로서는 나바라 왕국이 감히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고 있기도 하지만 위그노이기 때문에 눈에 가시처럼 생각되었다.


나바라 왕국은 지금의 바스크 지방에 있었다. 바스크 지방의 민속


카테리나는 처음에는 개신교인 위그노와 공연히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중용정책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기스 형제가 위그노를 박해하려고 하자 그러면 안된다고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물론 카테리나도 오리지널 로마가톨릭이며 과거 교황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인 위그노를 두둔하거나 동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적으로 삼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니까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그들의 정부를 만들고 싶었던지 프란시스 2세를 축출하고 대신 위그노 출신으로 왕을 삼고자 했다. 위그노들이 처음에 기대했던 사람은 바라라 왕국의 안투안 드 부르봉 왕이었다. 프랑스의 왕위가 부르봉에게 돌아간다면 첫번째 대상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동생으로 콩데 공자인 루이 드 부르봉이 위그노를 위해 더 헌신적으로 기여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루이를 프랑스의 왕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다. 루이는 사실상 기스형제를 힘으로라도 몰아낼 생각을 했다. 그런 음모를 접한 기스 형제는 조정을 샤토 당부아즈(Chateau d'Amboise)로 옮겼다. 방어하기에 좋은 성이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성의 바깥은 숲이었다. 루이 드 부르봉의 군대가 성을 포위하였다. 기스 공작은 성밖의 반란군을 급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반란군의 사령과까지 사살했다. 반란군의 상당수는 강에 빠져 죽거나 오도 갈데가 없어서 성벽으로 기어오르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런 모습을 카테리나와 궁신들이 지켜보았다.


샤토 당부아즈. 반란군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성이었다. 나바라의 바란군이 공격해 왔을 때 기스 형제가 이들의 반란을 진합했다.


카테리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개신교들이 무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한 그들의 신앙의 자유를 용인하는 주의였다. 카테리나는 1560년 8월에 퐁텐블루에서 열린 명사회(Assembly of Notables) 회의에서 종교에 대한 이같은 원칙을 발표하였다. 사학자들이 카테리나가 명사회에서 선언한 것을 정치가로서 카테리나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편, 샤토 당부아스에서 패배한 콩테 백작 루이는 1560년 가을에 군대를 다시 일으켜서 파리를 공략코자 했다.이에 카테리나는 모후의 권한으로서 콩테 백작을 할 말이 있으니 퐁텐블루 성으로 불여들어 오라고 전했다. 순진하게 카테리나의 부름에 응한 콩테 백장느 성에 들어서자마자 감금되었다. 몇달후인 11월에 콩테 백작에 대한 재판이 이루어져서 결국 왕권에 대한 도전, 즉 반역죄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때에 국왕인 프란시스 2세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서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귀에 종기가 생긴 것이 덧나서였다. 그래서 콩테 백작에 대한 사형집행은 당분간 연기되었다. 한편, 카테리나는 아들 프란시스가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으로 예상되자 부르봉의 안투안과 협약을 맺었다. 샤를르가 다음 국왕이 될 터인데 안투안이 샤를르의 섭정권을 포기하고 대신에 감옥에 갇혀 있는 콩데 백작을 석방하겠다는 협약이었다. 그래서 프란시스가 1560년 12월 5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추밀원은 카테리나를 프랑스 총독(Gouvernante de France)으로 임명하고 많은 권력을 행사할수 있도록 결정했다. 카테리나는 딸 엘리자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원칙적인 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네 오빠들의 앞날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리 교외의 폰텐블러궁(Palace de Fontaineble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