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권세 있는 여인

정준극 2018. 6. 30. 21:52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권세 있는 여인


메디치의 카테리나에 대하여는본 블로그의 '마담 스네이크' 편에서 소개하였지만 그래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있기에 다시 정리하여 소개하니 참고가 되기 바랍니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메디치의 로렌초 2세와 라 투르 도베르뉴의 마델레이느의 딸로서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결혼하여서 1547년부터 1559년까지 프랑스의 왕비였으며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뒤를 이은 세명의 왕, 즉 프란시스 2세, 샤를르 9세, 앙리 3세의 어머니로서 프랑스 정치 생활에 폭넓은 영향을 끼친 여인이다. 또한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1560년부터 1563년까지 아들인 샤를르 9세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프랑스를 직접 통치하기까지 했다. 카테리나는 1533년 14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국왕인 프란시스 1세와 왕비 클로드의 둘째 아들인 앙리와 결혼하였다. 남편 앙리는 부왕인 프란시스 1세가 1547년에 서거하자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으며 따라서 카테리나도 정식으로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앙리는 앙리 2세로서 프랑스를 통치하였는데 그의 통치기간 중에 카테리나가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배제하였다. 대신에 앙리 2세는 수석 정부인 디아느 드 뿌아티에에게 여러 혜택을 소나기 처럼 퍼부어 주었다. 마담 뿌아티에는 앙리 2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마담 뿌아티에가 국사에 대하여 앙리 2세에게 무어라고 조언 내지 청원하면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 주는 형편이었다. 앙리 2세가 왕이 된지 12년 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때부터 카테리나는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초상화가 카테리나의 실제 모습과 가장 근접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였다.


남편의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이 된 카테리나의 큰 아들 프란시스 2세는 나이도 15세 밖에 되지 않아서 연소하였거니와 병약하여서 대부분의 정사는 모후 카테리나가 조언대로 처리되었다. 그러다가 프란시스 2세가 왕이 된지 1년후에 뜻하지 아니하게 세상을 떠나자 프란시스 2세의 아래 동생인 샤를르가 샤를르 9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때 샤를르 9세는 겨우 9세의 어린이였다. 카테리나는 샤를르 9세를 대신하여 권력을 휘어 잡았다. 그러기를 14년이나 했다. 샤를르 9세가 1574년에 세상을 떠나자 카테리나의 셋째 아들인 앙리가 앙리 3세로서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카테리나가 권력을 쥐고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앙리 3세는 두 형들처럼 연소하거나 병약하지 않았다. 앙리 3세는 모후인 카테리나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낼 때에 겨우 그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그때 카테리나는 70세였다. 그런데 앙리 3세는 모후인 카테리나가 세상을 떠난지 7개월 후에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모후로부터 왕권을 회복하긴 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앙리 3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나바레의 왕 앙리 4세가 프랑스의 왕도 겸하였다.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프랑스의 역사에서 막을 내리고 새롭게 부르봉 왕조가 무대에 등장하였다.


영화에서 카테리나와 아들 샤를르


카테리나의 세 아들이 차례로 프랑스의 국왕이 되어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기는 프랑스 전역에서 쉬임없이 내전이 일어나고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 처참한 종교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말할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카테리나는 왕실과 정부를 꿋꿋이 지켜나가는 일을 주도하였다. 카테리나는 칼빈주의 개신교, 즉 위그노(Huguenots)가 세력을 확장하자 처음에는 이들과 타협을 하거나 양보하여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물론 프랑스는 정통 로마가톨릭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발호를 묵과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카테리나는 신학적인 문제로서 사태를 수습코자 했으나 사실상 신학적인 논쟁만으로는 위그노의 기세를 잠재울수 없었다. 카테리나는 한편으로는 위그노가 두려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들이 누구이기에 감히'하는 분노를 억누를 수가 없어서 위그노에 대하여 강경로선을 채택키로 했다. 위그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1572년 성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은 대표적인 위그노 탄압이었다. 이때에 파리를 중심으로해서 지방에 있는 위그노들에 이르기까지 수천명이 학살을 당하였다. 위그노에 대한 학살과 탄압은 카테리나의 세아들들이 프랑스의 왕으로 있을 때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대학살이었다. 이에 대한 비난은 자연히 왕의 배후에서 국사를 쥐고 흔들었던 카테리나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카테리나가 권력을 위해서 잔혹할 정도의 수법으로 쥐고 흔들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으로 그렇게까지 독재를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카테리나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치중했고 그러다보니 오해받을 만한 행동도 했던 것이라는 얘기다. 잘아는대로 카테리나는 문화예술에 대한 지대한 파트론이었다. 미술을 좋아했고 발레를 좋아한 여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리나는 프랑스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든 세 왕의 모후였기 때문에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 아닐수 없다.


이에르베르의 오페라 '위그노'에는 성바르톨로뮤 대학살이 배경으로 나온다. 스트라스부르 오페라 무대


카테리나는 1519년 4월 13일 플로렌스 공화국의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 공작인 메디치의 로렌초와 불로뉴 백작부인인 라 투르 도베르뉴의 마델레이느의 유일한 자녀로 태어났다. 로렌초와 마델레이느 부부는 그 전해인 1518년에  앙부아스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황제에 대응하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와 교황 레오 10세의 동맹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카테리나가 태어나자 로렌초와 마델레이느는 마치 아들을 본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런데 운명도 가혹하시지, 카테리나가 태어난지 한달 쯤 지나서 아버지 로렌초와 어머니 마델레이느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마델레이느는 4월 28일에 페스트에 감염되어서 숨을 거두었고 아버지 로렌초는 5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메디치의 로렌초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타이틀인 우르비노 백작(영주)는 라이발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 1세에게 넘어갔다. 로렌초와 마델레이느의 결혼을 주선했던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는 어린 카테리나를 파리로 데려와서 프랑스의 궁전에서 키우고자 했으나 교황 레오 10세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메디치 가문의 저택인 플로렌스의 팔라쪼 베키오


여기서 잠시 플로렌스 공화국(Repubblica Fiorentina)에 대하여 소개코자 한다. 플로렌스 공화국은 12세기부터 투스카나 지방의 플로렌스에 집중된 중세 국가를 말한다. 1115년에 플로렌스 사람들이 투스카나의 변경백(Margraviate)에게 저항하는 봉기를 하였다. 당시 플로렌스를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마틸다의 죽음이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서였다. 이같은 봉기의 결과로 플로렌스 시민들은 공화제 체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공화제는 자문위원회(시뇨리아 데 피렌체)가 통치하였다. 자문위원회들은 플로렌스 길드 멤버들이 선출하였다. 그러다가 1434년에 메디치의 코시모가 공화국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고 그후 1494년까지 메디치가 플로렌스를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플로렌스는 또 다시 공화제로 돌아갔으나 1512년에 나중에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반니 데 메디치가 공화국을 재정복하고 메디치의 플로렌스 통치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얼마후인 1527년에 플로렌스는 메디치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이른바 꼬냑전쟁이 진행중이던 때였다. 메디치는 1531년에 플로렌스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회복하였다. 이어서 이듬해인 1532년에는 공화국 정부를 폐지하였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를 플로렌스의 공작으로 임명하여서였다. 그리하여 공화국은 사라지고 세습 군주국이 되었다. 그러므로 플로렌스 공화국은 1115년부터 1532년까지 존재했었다고 보면 된다.


플로렌스에 있는 팔라쪼 메디치 리카르디의 대접견실. 부모를 잃은 어린 카테리나는 잠시 이곳에서 지냈다.


다시 어린 카테리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부모를 모두 잃은 카테리나는 교황 레오 10세의 어드바이스에 따라 친할머니인 알폰시나 오르시니(피에로 데 메디치의 부인)의 손에 길러지게 되었다. 알폰시나가 1520년에 세상을 떠나자 카테리나는 숙모인 클라리체 데 메디치의 손에서 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그러는데 1521년에 교황 레오 10세가 세상을 떠났다. 잠시 메디치의 권세가 중단되었다가 1523년에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트 7세로 선출되자 메디치의 권세는 부흥되었다. 클레멘트 7세 교황은 카테리나를 바티칸으로 데려오는 대신에 플로렌스에 있는 팔라쪼 메디치 리카르디에서 지내도록 했다. 카테리나는 우르비노 공국의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신에 플로렌스 사람들은 어린 카테리나를 두케시나(duchessina: 작은 공녀)라고 불렀다. 그러는 중, 1527년에 플로렌스 시민들은 교황 클레멘트의 대리인으로서 메디치가 플로렌스를 통치하는 것을 반대하여서 봉기하였고 이윽고 메디치를 몰아냈다. 봉기를 주도한 사람은 실비오 파세리니 추기경이었다. 그후 카테리나는 인질이 되어서 이곳저곳 수녀원을 전전하며 지냈다. 카테리나가 14세에 프랑스의 왕자와 결혼하기 전까지 3년 동안 머물렀던 수녀원은 산티시마 아누치아타 델레 무라테(Santassima Annuziata delle Murata)라는 곳이었다.



플로렌스의 모나스테로 델레 무라타. 카테리나가 거의 연금생활을 했던 수녀원이다. 1883년부터 1985년까지는 이곳이 플로렌스 감옥소로 사용되었다.


카테리나는 실상 이 수녀원에 있을 때가 전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바 있다. 플로렌스를 빼앗긴 교황 클레멘트로서는 플로렌스를 되찾기 위해서 1530년에 당시 스페인 왕인 샤를르 5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의 대관식을 치루어주었다. 스페인의 샤를르 5세는 1519년부터 사실상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역할을 하였으나 교황에 의한 대관식을 갖지는 못하고 있었다. 샤를르 5세의 군대는 바티칸에서 대관식을 가지기 1년 전인 1529년 10월에 플로렌스에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성 안에서는 시민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메디치 출신인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공모하여서 플로렌스를 점거하고 메디치의 사람을 다시 플로렌스의 통치자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하며 분노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플로렌스의 수녀원에 은거하고 있는 카테리나를 잡아서 발가벗겨 죽여서 성벽에 매달자는 극단적인 주장까지 나왔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카테리나를 성밖에 있는 스페인 군대에게 던져주어서 마치 일제시대의 종군위안부 처럼 만들자는 주장을 했다. 플로렌스는 거의 1년 후인 1530년 8월에 공성을 견디다 못해 샤를르 5세의 군대에게 항복하였다. 교황 클레멘트는 플로렌스에 있는 카테리나를 로마로 불러서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았느냐면서 크게 위로하였다. 이어 교황은 비록 카테리나가 14세에 불과했지만 어서 적당한 남편감을 주선해 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을 시키기는 시키되 교황의 위상제고에 도움이 될만한 신랑감을 찾아주자는 생각이었다.

 

1529-1530년의 샤를르 5세 군대에 의한 플로렌스 공성


카테리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결혼 얘기가 나오기 시작한 때에 베니스의 특사가 카테리나를 보고 이렇게 설명했다. '작은 키에 마른 체구였다. 얼굴 모습이 섬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이 튀어나온 것이 메디치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수 있게 한다'. 일단 결혼 얘기가 나오자 청혼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도 그중 한명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는 성격이 급했는지 당장 결혼식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는 차에 1533년에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가 자기의 둘째 아들인 오를레앙공 앙리와 메디치의 카테니라와 결혼하면 어떻겠느냐고 교황에게 넌지시 제안하였다. 교황은 앙리 왕자야 말로 카테리나에게는 대어를 낚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앙리는 왕자이지만 카테리나는 평민이기 때문에 그런 영광이 없었다. 그리하여 14세 동갑내기 앙리와 카테리나의 결혼이 적극 추진되었다. 결혼식은 1533년 10월 28일 마르세이유에 있는 에글리스 생 프레올 레 오귀스탱(Eglise Saint-Ferréol les Augustins)이란 곳에서 거행되었다.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주례를 섰다.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는 결혼식이었고 양가의 선물만해도 대단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에서는 카테리나를 위해서 마상무술시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무도회가 열렸다. 무도회에 참석했던 젊은 커플은 부부가 되는 의식의 완성을 위해서 자정쯤해서 침실로 향하였다. 신혼침실에는 신랑의 아버지인 프란시스가 이미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젊은 커플이 결혼을 완성할 때까지 머무르다가 떠났다. 별 아버지도 다 있다. 프란시스는 '두 사람이 마치 마상에서 창시합을 하듯 용감하게 첫날밤을 지냈다'고 말했다. 별 시아버지도 다 있다. 이어 아침이 밝았다. 교황 클레멘트가 아침 일찍 신혼침실을 방문했다. 젊은 커플이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데 찾아와서 교황으로서의 첫날 밤을 잘 지낸데 대한 축복을 내려주고 갔다. 별 교황도 다 있다.


카테리나와 앙리가 결혼식을 올린 마르세이유의 에글리스 생 프레올 레 오귀스탱의 오늘날의 모습


첫날 밤은 그렇게 보냈지만 그후로 카테리나는 신랑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1년이 지나도록 그랬다. 다행히 카테리나를 모시는 귀부인 시녀들이 카테리나에게 아주 잘 대해 주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지내기는 했다. 그러는 중에 이듬해인 1534년 9월 25일에 교황 클레멘트 7세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 궁전에서 카테리나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클레멘트 7세에 이어 새로 교황이 된 바오로 3세는 프랑스와의 약속이 뭐 말라 죽은 것이냐면서 무시했다. 특히 바오로 3세는 카테리나의 결혼과 관련해서 프란시스에게 약속한 막대한 금액의 지참금을 못주겠다고 나섰다. 프란시스는 그렇다고 돈 내놓으라고 아우성 칠 형편도 아니었다. 바오로가 메디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프란시스는 '이 아가씨가 옷하나만 걸치고 시집왔구나'라면서 탄식했다. 앙리는 카테리나를 와이프로서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에 앙리가 잘한 일도 있었다. 정부를 여러명이나 거느리며 지낸 것이다. 카테리나는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거의 10년을 지냈다. 당연히 10년 동안 회임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1537년에 앙리의 정부 중의 하나인 필리파 두치라는 여인이 딸을 낳았다. 앙리는 그 딸을 자기 소생이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이 말인즉 카테리나가 회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앙리 자기의 책임이 아니라 카테리나 쪽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왕자비가 아이도 낳지 못하니 말이나 되냐면서 카테리나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카테리나와 앙리의 결혼식


1536년에 앙리의 형인 프란시스가 테니스를 치고나서 감기에 걸려 캑캑 거리더니 며칠 후에 어이없게도 세상을 떠났다. 카테리나의 남편인 앙리가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카테리나는 왕위계승자의 부인으로서 다음번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낳아야 했다. 주위 사람들은 앙리에게 카테리나와 이혼하고 새장가를 들라고 성화였다. 카테리나는 절망 중에 있게 되었다. 카테리나는 회임을 위해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다. 예를 들면 암소의 똥을 침대 아래에 놓아둔다든지, 숫사슴의 뿔 조각을 자기의 은밀한 곳에 넣어 둔다든지, 당나귀의 소변을 마신다든지 등등이었다. 그리하여 정성이 갸륵했던지 또는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지 아무튼 1544년 1월 19일에 첫 아들을 낳았으니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라고 불렀다. 카테리나는 한번 임신해서 아이를 출산하더니 그 다음부터는 별로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의사인 장 페르넬에게는 감사해야 했다. 장 페르넬이 앙리와 카테리나의 생식기를 자세히 관찰해 보았더니 두 사람 모두 약간의 기형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자료에는 앙리의 그것만이 기형이라고 되어 있으나 앙리는 그 전에 정부들과 잠자리를 가져서 아이가 생겼으니 기형이라고 해도 정히 쓸모 없는 기형은 아닌 것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의사는 두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할지 어드바이스를 해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카테리나는 또 다시 임신하여 이듬해인 1545년 4월 2일에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이 엘리자베스가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낳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 왕비였으며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 나오는 바로 그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 왕비이다. 카테리나는 이어 계속 임신하여 토털 여덟 자녀를 생산했으며 그 중에서 여섯이 유아기를 거쳐 성장하였다.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그저 많이 나서 그 중에서 몇이라도 건지자는 전략이었다. 요즘처럼 하나도 낳지 말아서 편하게 지내자는 것이 아니었다. 생존한 자녀 여섯명 중에서 아들들은 프란시스 2세, 샤를르 9세, 앙리 3세, 그리고 앙주 공작 프란시스가 되었다. 메디치의 카테리나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불철주야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카테리나가 석녀라는 오명을 씻고 아이들을 줄줄이 낳았기 때문에 혹시 남편 앙리와의 금술이 좋아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었다. 앙리는 자기보다 한참 연상인 디아느 드 뿌아티에라는 여인과 죽고 못사는 바람에 결국 카테리나는 소외감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도 앙리는 카테리나가 정식 부인이기 때문에 홀대는 하지 못했다. 부왕인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나자 앙리가 왕위에 올랐고 2년 후에 카테리나도 왕비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1549년 6월 10일 생 드니 교회에서였다.


카테리나가 프랑스 왕비로서 대관식을 가진 파리의 생 드니 교회.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석관도 이곳에 있다.


대체로 왕비라고 하면 왕의 권세를 등에 엎고 상당한 세력을 누렸을 터인데 남편인 앙리가 프랑스의 왕이 되었지만 카테리나는 명색만 왕비일뿐 아무런 권세도 누리지 못했다. 그건 남편 앙리가 철저하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간혹 카테리나가 섭정의 역할을 한 일은 있다. 남편 앙리가 출타 중에 대신 정사를 돌보기는 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왕비 카테리나의 권세는 명목상일 뿐이었다. 카테리나 대신에 앙리의 정부인 마담 뿌아티에가 왕비처럼 행세하며 권력을 누렸다. 앙리는 마담 뿌아티에에게 저 유명한 샤토 드 슈농소를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카테리나가 그처럼 갖고 싶어했던 샤토였다. 그것만 보아도 앙리가 카테리나 대신에 마담 뿌아티에에게 푹 빠져 있었음을 알수 있다.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앙리라는 사람은 주책이 없었다. 어느때는 외교 사절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마담 뿌아티에의 무릎에 앉아 기타를 치고 잡담을 늘어놓으며 또한 마담 뿌아티에의 젖가슴을 애무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디 앉을 데가 없어서 정부의 무릎에 앉아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별 짓을 다 했는지 말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마담 뿌아티에는 카테리나를 라이발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나이가 한참 많아서였는지 모른다. 마담 뿌아티에는 앙리에게 제발 카테리나와 잠자리를 자주 하여서 아이들을 생산하도록 해야 한다고 어드바이스하기 까지 했다. 1556년에 카테리나는 딸 쌍둥이를 낳았다. 조앤과 빅토리아였다. 대단한 난산이었다. 출산을 도운 의사는 딸 하나가 자궁에서 이미 죽은 것을 알고 그 아기의 다리를 꺾어서 겨우 태어나도록 했다. 그래서 카테리나의 생명을 건졌다. 또 다른 딸은 살아서 태어났지만 7주 후에 이상하게도 그만 숨을 거두었다. 조앤과 빅토리아 쌍둥이 딸은 카테리나의 마지막 출산이었다.


앙리가 정부인 마담 뿌아티에에게 선물한 샤토 드 슈농소


1559년 4월에 앙리는 신성로마제국 및 영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오랫동안 끌었던 이탈리아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에 국가간의 평화조약이라고 하면 대체로 결혼을 조건으로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1559년의 카토 캉브레시스 조약도 마찬가지였다. 카테리나의 열세살 짜리 딸인 엘리자베스와 스페인의 필립 2세가 결혼하도록 되었다. 당시에 국가간 결혼에는 대체로 대리결혼식을 치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따라 파리에서는 닷새 동안의 잔치가 벌어졌다. 무도회, 마스크, 마상무술경기 등이 거행되었다. 앙리도 마상무술시합에 참가하였다. 앙리는 기스(Guise)의 공작들과 경기를 벌여 이겼다. 그러나 몽고메리 백작인 가브리엘과의 경기에서는 목창에 맞아서 말에서 떨어질뻔 했다. 앙리는 몽고메리 백작과 다시 겨루어 보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고메리 백작의 목창이 앙리의 얼굴을 찔렀다. 앙리는 눈과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모두들 놀라서 난리를 치는 중에 앙리는 인근 샤토 드 투르넬레로 옮겨졌다. 머리에서 나무조각 다섯개를 빼냈다. 그중 한개의 나무 파편은 앙리의 눈과 뇌를 찌른 것이었다. 카테리나는 앙리의 옆에서 밤을 지샜다. 그러나 마담 뿌아티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만일 앙리가 죽으면 왕비인 카테리나로부터 핍박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앙리의 시력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결국 눈이 안보이고 말을 할수 없게 되었다. 앙리는 부상을 당한지 석달 후인 7월 10일에 숨을 거두었다. 나이는 40이었다. 카테리나는 부러진 창을 앙블렘으로 사용하였다. 앙블렘에는 Lacrymae hinc, hinc dolor라는 말을 적어 넣었다. '이것으로부터 나의 눈물과 나의 고통이 나왔도다'라는 뜻이다.


생 드니 교회에 있는 앙리 2세와 카테리나의 석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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