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메디치의 카테리나

앙리 3세와 가톨릭 리그

정준극 2018. 7. 12. 11:37

앙리 3세와 가톨릭 리그


성바로톨로뮤 대학살이 있은지 2년 후인 1574년, 샤를르 9세가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테리나로서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한 셈이다. 샤를르 9세는 죽어가면서 '오 나의 어머니...'라고 외쳤다. 어머니 카테리나를 사랑한다는 것인지, 원망한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 다음의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 카테리나를 위한 일은 마지막으로 한가지 했다. 어머니를 다음번 왕이 될 사람의 섭정이 되도록 임명한 것이다. 다음번 왕은 샤를르의 동생인 22세의 앙리였다. 당주의 앙리(Henri d'Anjou)라고 불리는 사람이었고 나중에 앙리 3세로 불린 사람이다. 그때 당주의 앙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가서 있었다. 그 전해에 폴란드-리투라이나 연방의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방의 왕으로 봐벨(Wawel)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진지 석달 후에 형인 샤를르 9세가 세상을 떠나자 연방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왕이 되고자 파리로 돌아왔다. 앙리는 카테리나의 여러 아들 중에서 카테리나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다. 앙리는 다른 형들, 즉 프란시스 2세와 샤를르 9세와는 달리 나이가 어느정도 들어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앙리는 또한 다른 형들과는 달리 건강한 편이었다. 물론 폐가 약했고 간혹 피곤해서 현기증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건강한 편이어서 왕으로 오래 지탱할 전망이었다. 그러나 실상 앙리는 국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섭정으로 임명된 어머니 카테리나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그래서 앙리는 카테리나가 세상을 떠나기 몇주 전까지 정부의 일을 카테리나의 비서진에 의존하였다. 앙리는 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신앙생활에는 열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순례를 자주 다녔고 주님께서 당히신 고통을 대신 겪는 의식에도 즐겨 참여하였다. 고통의식은 대체로 채찍질을 당하거나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다니는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자학행위를 하는 것이 신앙의 표현이었다.


앙리는 왕위에 오른지 1년 후에 로레인 보데봉의 루이스와 결혼하였다. 결혼식은 대관식을 가진지 이틀후에 거행되었다. 원래 카테리나는 앙리를 다른 나라의 영향력있는 공주와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앙리는 왕족이 아닌 귀족가문의 여식을 배우자로 선택하였다. 그나저나 이때부터 앙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녀를 생산할수 없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종래에는 의사들이 앙리의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선언했지만 근자에 들어와서는 아무래도 허약체질이라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얼마 못가서 큰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앙리에게 아이가 생길 가능성은 점점 사라졌다. 카테리나의 막내 아들인 '무슈'라는 애칭의 프란시스는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는 듯이 장차 왕위계승자로서의 행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프란시스는 해가 자꾸 바뀌는데도 앙리에게는 아무런 이상이 생기지 않자 조바심을 갖기 시작한다. 급기야 프란시스는 인근 나라들의 개신교 왕족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왕을 바꾸려는 생각까지 했다. 카테리나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개신교(위그노)가 원하는 바를 거의 모두 들어주기로 한다. 이것이 이른바 '무슈 평화협정'(Peace of Monsieur)이다. 무슈라는 애칭의 프란시스가 요구한 사항들을 반영한 협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1584년 6월에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 저지대 국가들과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나서 건강을 돌보지 않아서였다. 카테리나로서는 애지중지하는 프란시스가 죽자 발루아 왕가의 종말을 보는 것 같아서 낙심천만이었다. 왜냐하면 앙리 3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난다면 동생인 프란시스가 왕위를 보전할수 있을 것인데 그 프란시스마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른바 살리카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자는 세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로써 나바라의 위그노 왕인 앙리가 프랑스의 다음 왕위를 계승할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


나바라의 왕인 앙리의 부인이 우여곡절이 많았던 카테리나의 막내 딸 마가렛이었다. 카테리나가 마가렛을 나바라의 앙리에게 시집 보낸 것은 앞으로 발루아와 부르봉의 관계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마가렛은 카테리나에게 있어서 목의 가시와 같았다. 막내 아들 프란시스도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 마가랫도 마찬가지였다. 마가렛은 나바라 왕국으로 시집을 갔으면 구구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남편을 집에 혼자 두고 놀기 좋은 프랑스 궁전으로 돌아왔다. 프랑스 궁전에 돌아와서 얌전히 있으면 그런대로 보아줄터인데 무슨 부인네가 그런지 아무튼 애인 사냥에 정신이 없었다. 카테리나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우선 마가렛을 어서 나바라로 돌려보내야 했다. 사절을 나바라로 보내어 마가렛의 귀환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그렇게 해서 안가겠다는 마가렛을 나바라로 돌려 보냈는데 3년 후인 1585년에 다시 나바라를 무단이탈했다. 이번에는 아장(Agen)에 있는 자기 소유의 저택으로 갔다. 그러면서 어머니 카테리나에게 연락해서 생활비가 없으니 돈 좀 보내달라고 했다. 카테리나는 식탁에서 음식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돈만 보냈다. 그러자 마가렛은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역시 제버릇 무엇 못준다고 젊은 남자를 구해서 즐기는 생활을 했다. 카테리나는 또다시 앙리에게 부탁해서 마가렛을 나바라로 데랴가도록 했다. 다만 이번에는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톡톡히 주어서 다시는 얼굴들고 다닐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도 곁들였다. 앙리는 마가렛을 데려와서 샤토 뒤상에 감금하였다. 젊은 애인 도비아크는 처형을 당했다. 카테리나의 부탁으로 마가렛의 눈 앞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카테리나는 유언장에서 마가렛의 이름을 삭제하고 그후로 세상 떠날 때까지 다시는 보지 않았다.


앙리 3세가 세상을 떠나고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의 왕까지 겸하였다. 카테리나는 프란시스나 샤를르처럼 앙리를 콘트롤 할수 없었다. 카테리나는 순회 외교사절로서 여러 나라를 순방하는 일을 맡았다. 카테리나는 1578년에 프랑스 남부의 여러 지방을 순방하면서 위그노 지도자들을 면담하였다. 성과는 좋았다. 위그노에게 어느정도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 주면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발벗고 나서도록 합의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카테리나를 새롭게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579년에 파리로 돌아올 때에는 의회를 비롯한 시민들이 파리 교외까지 나가서 카테리나를 마중하였다. 카테리나가 위그노들과 평화공존이라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자 가톨릭의 핵심인물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반기지 않았다. 가톨릭은 '무슈 평화협정' 이후 각 지방의 가톨릭을 연결하는 리그를 구성했다. 겉으로의 명목은 종교와 신앙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1584년에 왕위 계승자인 프란시스가 세상을 떠나자 가톨릭 지도자들은 기스 공작을 가톨릭 리그의 리더로 추대하였다. 기스 공작은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저지하고 대신에 앙리의 가톨릭 삼촌인 부르봉의 샤를르 추기경을 왕위계승자로 삼기로 했다. 기스 공작은 가톨릭의 영주들, 귀족들, 분봉 군주들와 협약을 맺고 이단 퇴치를 위해서 전쟁도 불사한다는 약속을 했다. 이단이란 물론 위그노를 말하는 것이었다. 앙리 3세는 가톨릭 리그와 전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앙리는 가톨릭과 개신교와 동시에 전투를 벌일수는 없었다. 둘다 앙리의 군대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1585년 7월 7일에  조약(Treaty of Nemours)가 체결되었다. 앙리는 가톨릭 리그의 요구사항들을 모두 받아들여야만 했다. 심지어는 가톨릭 군대에 대한 경비도 앙리가 지불해야 했다. 왕권은 권위를 잃었다. 스페인이 영국을 침공하기 직전인데도 영국을 도울수가 없었다. 앙리는 어디론가 피신해서 기도생활만 하였다. 그리고 카테리나가 더 이상 국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1587년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반격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1587년 2월 8일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처형하자 가톨릭의 반발은 위험수위까지 올라올 정도였다. 스페인의 필립 2세는 영극 침공을 준비하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아르마다)가 언제 프랑스를 침공할지 예측불능이었다. 가톨릭 리그는 스페인의 예상 침공에 대비하여 서해안 항구들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앙리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가톨릭 리그의 파리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스위스로부터 용병들을 데려왔다. 파리 시민들은 파리는 시민들 스스로 지키겠다고 하면 앙리의 용병을 반대하였다. 파리 시민들은 1588년 5월에 민병대를 구성하고 파리의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했다. 이들은 어느 누구의 명령도 받지 않지만 기스공작의 명령만은 받겠다고 선언했다. 카테리나가 성당에서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민병대의 바리케이트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카테리나는 가까스로 설명을 하여 통과를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새도 떨어트릴수 있다던 모후였는데 지금은 시민들의 허락을 받아서야 성당에도 갈수 있으니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날 카테리나는 점심을 먹으면서 내내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카테리나는 파리로부터 피신하여 있는 앙리에게 연락하여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그저 양보하여라. 그리고 훗날을 기약하자'고 설득하여 파리로 들어오도록 했다. 앙리는 새로운 법령에 서명하고 가톨릭 리그의 최근 요구 사항들을 모두 수락하였다. 1588년 9월 8일에 앙리는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각료들을 모두 해임하였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앙리는 이러한 조치를 하면서 카테리나와는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 카테리나는 폐에 염증이 생겨서 어두운 방에서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었다. 카테리나의 권세는 이로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앙리는 가톨릭 리그를 와해시켜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다.



앙리는 1588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 둔 겨울날, 가톨릭 리그의 리더인 기스 공작에게 의논할 일이 있으니 샤토 드 불루아(Chateau de Blois)로 들어오라고 통보하였다. 기스 공작이 왕의 방으로 들어서자 숨어 있던 45인의 호위병들이 갑자기 뛰쳐나와서 기스 공작을 죽였다. 앙리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병사들을 기스 공작가에 보내어 기스 공작의 동생인 루이스 추기경을 비롯한 기스가 사람들을 체포하여 왔다. 루이스 추기경은 다음날 샤토 드 블루아의 지하감방에서 죽임을 당했다. 앙리는 아랫층의 침실에 있는 카테리나를 찾아가서 '기스 공작을 죽였습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그에게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후로 가톨릭이던지 위그노던지 카테리나의 말은 믿지 않으려 했다. 1589년 1월 5일, 카테리나는 향년 69세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늑막염이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카테리나는 왕이 그를 죽은 염소만도 못하게 취급하자 절망하여 죽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당시에 파리는 와의 권위를 무시하는 적도들의 손에 있기 때문에 카테리나의 시신은 임시로 블루아에 안치할수 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8개월 앙리는 자크 클레망이라는 자객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그때 앙리는 나바라의 왕 앙리 4세와 함께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하려 했었다. 앙리 4세는 뒤를 이어 프랑스의 왕으로 내정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앙리 3세의 암살사건은 거의 3세기 동안 프랑스에 군림하였던 발루아 왕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었으며 이와 함께 부르봉 왕조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카테리나가 세상을 떠난지 1년 후에 그의 시신은 파리에 있는 생드니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그후 1793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때 혁명 폭도들 중의 한 사람이 카테리나의 관을 열고 유골을 공동묘지에 던져 넣었다. 프랑스의 다른 왕들과 왕비들의 유골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파리 교외의 샤트 드 블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