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베토벤의 사람들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

정준극 2018. 7. 25. 18:55

베토벤의 제자 칼 체르니

베토벤처럼 평생을 미혼으로 지내다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슈베르트 등과 함께 선도의 만장을 들다


칼 체르니


체르니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오스트리아 작곡가'편에서 잠시 소개하였지만 별도로 소개하는 것이 보람있을 것 같아서 이에 소개하는 바이다. 사실 필자는 체르니가 작곡한 음악을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있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노네트 등은 너무 좋아해서 자꾸 듣고 있다. 체르니의 피아노 음악은 경쾌하다. 부담이 없다. 기분이 좋다. 매력적이다. 그리고 재미있다. 체르니는 비엔나 토박이이다. 비엔나의 무드, 비엔나의 기질이 그의 작품 속에 녹아 있다. 마치 옛 제국의 영화에 대한 향수를 머금은 듯한 멜로디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체르니의 음악을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작곡가였다. 체르니는 생전에 1천여 편에 이르는 작품을 작곡했다. 체르니가 쓴 피아노 교본은 전세계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뛰어난 교본이다. 체르니의 피아노 교본이 너무나 유명해서인지 사람들은 체르니라고 하면 피아노 교본만을 생각하고 다른 작품들은 있는지조자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체르니의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정말로 주옥과 같다. 피아노로서 이런 음악들을 만들어 낼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칼 체르니는 위대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며 피아노 교사이며 그 스스로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체르니의 스승인 베토벤. 사람들은 베토벤과 체르니에 대하여 Great Master, Great Pupil(위대한 스승, 위대한 제자)라며 칭송했다.


체르니를 '베토벤의 사람들' 편에서 소개하는 것은 체르니가 베토벤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첫째,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 베토벤의 제자들은 대체로 귀족 집안의 여식들이었고 이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는 교양있는 여자로 보이기 위해서인데 체르니는 전문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가 되기 위해 베토벤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두번째는 체르니의 생애와 베토벤의 생애를 비교해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할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지낸 것이다. 그래서 후손이 없다. 만일 체르니에게 후손이 있어서 오늘날까지 이어 온다면 세계 각국으로부터 '체르니 피아노 교본'에 대한 인세만 받아도 대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세번째로 체르니는 누구보다도 베토벤의 서거를 애통해 했다. 그래서 베토벤의 장례식 때에 슈베르트 등과 함께 운구의 앞에서 만장을 들고 장례행렬을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체르니는 베토벤의 묘소가 있는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에 묻혔다. 베토벤의 청각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도 체르니였다. 어느날 체르니가 베토벤의 귀를 보니 솜으로 틀어막았는데 솜에는 누런 액체가 배어 있었다는 것이다. 귀에 염증이 생겨서 고름이 흘러나온 것은 솜으로 막았던 것이다. 그래서 체르니는 베토벤의 귀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채기보다 훨씬 전에 알게 되었다. 체르니는 평생을 베토벤을 존경하며 살았다. 그리고 베토벤이 애지중지했던 조카 칼의 피아노 레슨도 체르니가 맡아했다.


보헤미아의 중앙지대에 있는 아름다운 님부르크. 체르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칼 체르니(Carl Czerny)는 1791년 2월 21일 비엔나의 현재 2구 레오폴드슈타트에서 태어났다. 체르니가 태어난 집은 봐그가쎄()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지명도 바뀌고 건물들도 새로 들어서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경이 되었다. 다만, 체르니의 생가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가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은 교회는 현재 2구 알렉산더 포흐 플라츠(Alexander-Poch-Platz) 6번지에 있는 성레오폴드교회(St Leopoldkirche)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체르니의 발자취를 순례코자 하면 성레오폴드교회부터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나저나 체르니가 태어난 1791년이라면 저 위대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물론 모차르트는 12월에 세상을 떠났고 체르니는 그보다 훨씬 앞선 2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무튼 '위대한 모차르트가 떠나니 마치 모차르트를 대신이나 하듯 체르니가 태어났다'는 말이 실감이 날수 있다. 체르니는 테어난지 며칠 후에 2구 레오폴드슈타트의 알렉산더 포흐 플라츠에 있는 성레오폴드교회(St Leopold Kirche)에서 세례를 받았다. 칼 체르니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체코(보헤미아)가 오리진이었다. 체르니의 아버지 벤첼 체르니도 음악가였다. 오보이스트였으며 또한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였으며 노래도 잘 부르는 성악가였다. 그러나 대체로 그 시대의 음악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체르니의 아버지 벤첼도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졌으니 수리공이었다. 가구나 기계같은 것을 수리하는 수리공이었다. 체르니의 할아버지도 음악가였다. 프라하 인근의 님부르크(Nymburg)라는 곳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한 분이었다. 체르니의 어머니 마리아 루치츠카는 모라비아 여인이었다. 체르니의 아버지 벤첼은 직업을 찾아서 부인을 데리고 비엔나로 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비엔나에서 체르니가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체르니가 태어난지 고작 6개월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폴란드의 어떤 장원에서 피아노 교사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부인과 어린 체르니를 데리고 폴란드로 가서 4년 남짓을 지냈다. 그후 체르니가 네살 때에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래서 아무튼 체르니는 어릴 때에 체코어로 생활했기 때문에 비엔나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성레오폴드교회. 원래 이 교회가 있는 자리에는 유태인 회당(시나고그)이 있었다. 레오폴드 1세 황제는 시나고그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로마가톨릭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 그래서 성레오폴드교회가 되었다.


체르니는 아버지가 음악가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체르니는 어릴 때부터 음악의 신동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심지어는 모차르에 비견할만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체르니는 세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일곱살 때부터는 작곡을 했다. 아버지는 어린 체르니에게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익히도록 교육했다. 그래서인지 체르니의 작품들을 가만히 보면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의 스타일이 조금씩 가미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체르니가 처음으로 일반 콘서트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1800년, 그러니까 그가 아홉살 때에 비엔나에서 였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 C 단조룰 연주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신동 체르니를 칭찬했다. 체르니가 베토벤을 처음 만난 것은 1801년이었다. 체르니가 꼭 열살 때였다. 마침 체르니의 아버지와 잘 아는 체코의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인 벤첼 크룸프홀츠(Wenzel Krumpholz)가 비엔나에 왔는데 체르니의 아버지는 크룸프홀츠가 베토벤과도 잘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어린 체르니를 베토벤에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어린 체르니는 크룸프홀츠와 함께 베토벤의 집을 찾아갔다. 베토벤은 1801년에서 1802년까지 1년 동안 오늘날의 1구 자일러슈태테(Seilerstätte) 15번지의 집에 살았다. 이집은 현재 뮐러바이슬'(Müllerbeisl)이다. 바이슬이란 단어는 자그마한 식당을 말한다. 베토벤은 어린 체르니에게 '파테티크 소나타'와 '아델라이데'의 악보를 주면서 피아노를 연주해 보라고 말했다. 체르니는 비록 초견이지만 두 곡을 완벽하게 연주했다. 베토벤은 크게 감동했다. 베토벤은 열살 짜리 체르니를 당장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체르니는 1804년까지 베토벤의 제자로서 개인 레슨을 받았고 그 후에도 간혹 시간을 내어 찾아가서 지도를 받았다. 체르니가 베토벤에 대하여 감동한 것은 베토벤의 즉흥곡을 만들어서 연주하는 솜씨가 너무나 훌륭하였으며 아무리 어렵고 빠른 핑거링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연주하였고 또한 트릴이나 스케일에 있어서는 매우 빠른 파트도 힘들이지 않고 연주하는 테크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감동을 준것은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 자기의 감정을 절제하는 자세였다.


현재의 1구 자일러슈태테 15번지의 건물. 아랫층에는 뮐러바이슬이라는 식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에서 체르니가 베토벤을 처음 만났다.


베토벤과 체르니의 관계는 더욱 발전해갔다. 베토벤은 1806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체져놓고 당시 15세에 불과한 체르니에게 피아노협주곡 1번의 초연의 연주자로 선정했다. 베토벤은 그만큼 체르니를 신뢰했고 능력을 인정했다. 그후 1812년,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침공했다가 무참히 퇴각하여 파탄에 빠진 바로 그 해에 체르니는 베토벤의 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5번 일명 '황제'를 피아니스트로서의 데뷔 연주회의 곡목으로 선정했다. 그때 체르니는 21세의 청년이었다. 베토벤은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베토벤과 체르니의 나이 차이는 21년이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의 초연은 실은 1811년 1월 비엔나의 로브코비츠 궁전에서 베토벤의 후원자이며 제자인 루돌프 대공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반을 위한 초연은 1811년 11월 라이프치히의 게봔트하우스에서 프리드리히 슈나이더의 피아노 연주로 이루어졌다. 간혹 혹자는 체르니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의 초연에서 연주했다고 말하지만 그게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체르니의 데뷔 음악회에서 연주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체르니는 실로 베토벤의 모든 피아노 작품들을 암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베토벤의 작품들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체르니는 1804-05년에 리흐노브스키 공자(Prinz Lichnowsky)의 궁전에서 1주일에 한번, 또는 두번씩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 때에는 다른 작품은 연주하지 않고 베토벤의 작품만 연주했다. 리흐노브스키 공자도 베토벤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래서 체르니가 오면 무작위로 '이걸 연주해 주시오, 저걸 연주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신청곡이었다. 그러면 체르니는 악보도 없이 그대로 연주하여 사람들을 기쁘고 놀라게 만들었다.


비엔나의 슈타트오퍼 뒷편에 있는 팔레 로브코비츠. 지금은 극장박물관이다. 이 곳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일명 '영웅', 피아노협주곡 5번 일명 '황제' 등이 초연되었다.


체르니는 4년동안 베토벤에게서 피아노 레슨을 받은후 독자적인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피아노 레슨 선생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체르니는 15세의 청소년이었다. 체르니는 학생들을 베토벤으로부터 배운대로 가르쳤다. 그래서 비엔나에서는 체르니를 '제2의 베토벤'이라고까지 부르며 재능을 칭찬했다. 체르니는 인기가 많아서 하루에 12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기의 집에서 레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귀족들의 저택을 방문해서 귀족들의 아들이나 딸들에게 레슨을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레슨을 했다. 그런 중에 우수한 제자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테오도르 될러(Theodor Döhler), 슈테펜 헬러(Stephen Heller), 지기스몬트 탈베르그(Sigismond Thalberg), 레오폴디네 블라헬카(Leopoldine Blahelka), 니네트 드 벨르비유(Ninette de Belleville) 등은 훗날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체르니가 28세 때에 프란츠 리스트의 아버지(아담 리스트)가 당시 여덟살인 프란츠를 데리고 체르니를 찾아와서 레슨을 받도록 했다. 훗날 체르니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아이는 창백한 모습이었고 어딘가 병약한듯 보였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할 때에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들썩거리는 스타일이었다. 어린아이이지만 마치 술취한 사람이라고 오해받을만 했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비정상적이었고 깔끔하지 못했으며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손가락들은 건반 위를 놀랍도록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듯 했다. 아무튼 나는 그가 지닌 탁월한 천부적인 재능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칼 체르니


리스트는 체르니의 제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체르니는 어린 리스트에게 베토벤, 클레멘티, 이그나즈 모셀레스, 그리고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작품들을 가르쳤다. 체르니는 어린 리스트의 뛰어난 재능에 너무 감동하여서 레슨비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리스트의 가족들은 비엔나에서 체르니가 살고 있는 거리와 같은 거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린 리스트로서는 체르니 선생님의 집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할수 있었다. 리스트는 체르니가 레슨비도 받지 않고 가르쳐 준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리스트는 성공해서 파리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마다 스승인 체르니의 작품을 반드시 프로그램에 넣음으로서 보답했다. 1823년에, 리스트가 열두살 때에, 체르니는 리스트를 가까스로 베토벤에게 소개하였다. 베토벤은 사람들이 음악의 신동이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자기에게 데려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나 체르니가 천거하는 아이이므로 만났다. 베토벤은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나서는 너무나 감동하여서 어린 리스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건 베토벤으로서 아주 예외였다. 리스트는 평생을 체르니와 베토벤을 존경하면 살았다. 리스트는 1852년에 Etudes d'execution transcendente를 존경하는 체르니 선생님에게 헌정하였다. 대단히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곡이다. 체르니는 평생을 비엔나에서 지냈다. 그런데도 비엔나에는 현재 그를 기념하는 상징들이 거의 없어서 무안할 지경이다. 체르니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라는 소개로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체르니가 비엔나를 떠나서 여행을 했던 것은 1837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갔던 것이 유일했다. 프랑스에서는 당연히 리스트의 도움을 받아서 연주회를 가졌다. 체르니는 잠시 동안이지만 영국도 방문했었다.


베토벤에게 어린 리스트를 소개하는 체르니


체르니는 1840년 이후에는 비엔나에만 있으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에 체르니는 피아노를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교본을 만들었다. 어린아이로부터 비르투오소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주는 피아노 교본이다. 이를 Gradus ad Parnassum이라고 불렀다. 번역하자면 '파르나수스로 향하는 단계'(Steps to Parnassus)라고 할수 있다. 파르나서스는 그리스에 있는 높은 산이다. 두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티토레아와 리코레이아라고 불렀다. 그 봉우리 중의 하나에는 아폴로와 뮤즈들이 살았다고 한다. 뮤즈들은 문학과 예술의 신들이다. 그래서 대가가 되려면 파르나수스의 봉우리에 올라서야 한다는 얘기가 생겨났다.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은 간단히 '그라두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입문'이라는 뜻이다. 또 하나의 피아노 거장인 무치오 클레멘티도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을 남겼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무치오 클레멘티(1752-1832)와 관련해서 한가지만 에피스도를 소개하면, 언젠가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쇤브룬 궁전에서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모차르트과 피아노 연주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콘테스트는 예의를 고려해서인지 타이라고 선언되었다. 모차르트는 타이에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인 클레멘티에 대하여 약간은 오만한 평가를 하였다. 말하자면 클레멘티보다는 자기가 한수 위라는 식의 논평이었다. 그러나 그후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스타일을 참고하여 여러 곡을 작곡했다. 나중에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테크닉에 대하여 참으로 경탄했다고 말했다.  


체르니와 함께 당대의 피아노 거장으로 존경받은 무치오 클레멘티


체르니는 1857년 8월 9일(어떤 자료에는 7월 15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였다. 체르니는 베토벤처럼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체르니는 그동안의 연주활동과 악보 출판으로 상당한 재산을 가질수 있었다. 체르니는 그의 재산을 모두 자선활동에 사용토록 유언했다. 체르니는 특히 스승인 베토벤을 생각해서 유산의 상당액을 청각장애자를 위해 사용토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의 가정부에게, 음악의 친구 협회에 기증하였다. 체르니가 비엔나의 어느 건물에서 세상을 떠났는지는 기록이 부족하여서 확실치 않다. 다만, 알수 있는 것은 체르니의 시신은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베토벤의 묘소가 있는 인근에 매장되었다는 것이다. 비엔나 20구 브리기테나우는 칼 체르니를 기념하여서 1907년에 지역난방공장 남쪽에 있는 거리의 이름을 '칼 체르니 가쎄'(Karl-Czerny-Gasse)라고 붙였다.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에 있는 체르니 묘소. 체르니 서거 150주년을 맞이하여 2007년에 묘비가 새롭게 마련되었다.


[체르니의 작품 세계]

체르니는 생애를 통해서 상당히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작품번호로는 861번이 마지막이지만 실제로는 1천 곡이상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르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피아노 음악만을 작곡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피아노 음악으로서는 연습곡(Etudes), 야상곡, 소나타, 오페라 주제곡을 편곡 내지 변주곡으로 만든 것 등이 있다. 연습곡(에뛰드)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지만 체르니는 피아노 작품에 '에뛰드'라는 용어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이다. 그후로 쇼팽, 리스트 등 여러 작곡가들이 에뛰드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작곡했다. 체르니는 피아노 작품 이외에 미사곡, 합창음악, 교향곡, 협주곡, 가곡, 현악4중주곡, 기타 실내악 등을 작곡했다. 체르니의 작품 리스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피아노 교본(Didactic pieces)일 것이다. 두개의 커다란 교본집을 들수 있다. 하나는 속도, 또는 빠르기를 연습하는 '빠른 연주를 위한 교본'(Schule der Geläufigkeir: The School of Velocity)이며 다른 하나는 '숙달된 손가락 테크닉을 위한 교본(Schule der Fingertigkeit: The Art of Finger Dexterity)이다. 그런데 체르니의 작품 중에서 미사곡, 합창음악, 현악 4중주곡, 오케스트라곡, 실내악곡 등은 유감스럽게도 상당수가 출판되지 않았다. 체르니는 이런 작품들을 '심각한 음악'(Serious music) 또는 '순수음악'이라고 불렀다. 체르니의 출판되지 않은 작품들의 악보는 현재 비엔나 악우회의 도서실에서 보관하고 있다. 체르니는 자녀가 없기 때문에 유언을 통해서 이들 귀중한 악보를 비엔나 악우회에 기증했다.


비엔나 악우회 건물. 체르니는 그가 작곡한 많은 작품들의 악보를 악우회에 기증하였다. 현재 악우회의 도서실이 보관하고 있다.


체르니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베토벤과 리스트의 중간 단계에 있는 스타일이다. 대체로 전통적인 소나타 형식에 환상곡과 같은 자유형식이 혼합된 것이라고 보면 된다. 고전적인 형식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후가를 사용한 바로크의 요소가 담겨 있다는 의미이다. 한편, 체르니의 야상곡(녹턴)은 쇼팽의 녹턴에에서 찾아 볼수 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친근한 멜로디의 녹턴이다. 녹턴에서는 리듬에 있어서도 유려한 면모를 찾아 볼수 있다. 실제로 쇼팽은 1828년에 비엔나에서 체르니를 만났고 그래서 체르니가 쇼팽의 녹턴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체르니는 '변주곡'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작품을 약 180곡이나 작곡했다. 그중에서 La Ricordanza라고 하는 Op 33은 근자에 블리디미르 호로비츠가 음반에 취입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체르니는 변주곡을 만들 때에 자기 자신의 주제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다른 작곡가들의 주제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만드는 일이 더 많았다. 예를 들면, 다니엘 오버, 베토벤, 빈첸조 벨리니, 안톤 디아벨리, 게타노 도니체티, 요제프 하이든, 하인리히 마르슈너, 모차르트, 니콜로 파가니니, 조아키노 로시니, 프란츠 슈베르트, 칼 마리아 폰 베버 등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만들었다. 체르니의 피아노 변주곡들은 대체로 솔로 피아노 작품이기도 하지만 네손을 위한, 여섯 손을 위한, 그리고 심지어는 여덟 손을 위한 변주곡도 만들었다. 어떤 변주곡은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있거나 또는 현악4중주의 반주가 있도록 했다. 체르니는 간혹 그의 변주곡들은 다른 장르, 예를 들면 환상곡, 론도, 또는 즉흥곡(Impromptu)과 연합하여서 사용하기도 했다.


체르니가 교향곡을 무려 7편이나 작곡했다면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근자에 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하나하나가 음반에 취입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최근에 취입된 교향곡은 체르니가 1814년에 작곡한 교향곡 6번이다. 체르니는 두개의 서곡도 작곡했다. C 단조와 E 장조이다. 이밖에 두드러진 작품은 교향적 합창음악으로 시편 130편을 주제로 삼은 것과 '노래의 힘'(Die Macht des Gesanges)라는 작품이다. 체르니는 실내악에 특별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체르니의 실내악은 대체로 피아노가 포함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피아노와 현을 위한 트리오', '피아노와 현을 위한 5중주',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플룻을 곁들인 피아노 변주곡' 등이다. 물론 피아노를 포함하지 않은 현악 4중주곡들도 다수가 있다. 체르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종교음악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미사곡과 찬송가들이다.


체르니는 1842년에 자서전적인 비망록인 '내 생애의 회상'(Erinnerungen aus meinem Leben)을 펴냈다. 체르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 저서이다. 다른 저서로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평균률에 대하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 '작곡 연습'(Die Schule der Praktischen Tonsetz Kunst: School of Practical Composition), '베토벤의 피아노곡을 제대로 연주하는데 대하여'(Über den richtigen Vortrag der säntlichen Beethoven'schen Klavierwerke: on the proper performance of all Betthoven's works for piano) 등이 있다.


체르니는 시대를 초월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에게 현대 피아노 테크닉의 아버지로 간주되고 있다. 체르니로부터 피아노 테크닉을 배운 사람들이 피아노 교사로서 제자들을 체르니의 테크닉대로 가르쳤고 또 그 제자들이 다음 세대의 제자들에게 체르니의 테크닉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처럼 체르니의 대를 이은 현대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몇명의 경우만 빌어서 알아본다.


○ 체르니→테오도르 쿨라크(Theodor Kullak: 독일)→모리츠 모츠코브스키(Moritz Moszkowski; 폴란드 출신의 독일)→반다 란도브스카(Wanda Landowska: 폴란드 출신 프랑스)

○ 체르니→테오도르 레셰티츠키(Theodor Leschetizky: 폴란드)→안나 예시포바(Anna Yesipova: 러시아)→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 러시아)

○ 체르니→테오도르 레셰티츠키→이그나시 얀 파데레브스키(Ignacy Jan Paderewski: 폴란드)→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 러시아)

○ 체르니→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헝가리)→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rause: 독일)→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칠레)

○ 체르니→프란츠 리스트→이스트반 토만(Istvan Thoman: 헝가리)→에르뇌 도나니(Ernö Dohnanyi: 헝가리)

○ 체르니→프란츠 리스트→마르틴 쿠라우제→에드빈 피셔(Edwin Fischer: 스위스)→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아르헨티나)


리스트가 체르니를 존경하여서 12개의 Transcendental Études를 헌정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체르니에게 작품을 헌정하였다. 1915년에 클로드 드비시는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에뛰드를 작곡했는데 그중에서 첫번째 것은 체르니에게 존경하여서 만든 것이다. Pour les cinq doigts d'apores Monsieur Czerny(무슈 체르니를 따른 다섯 손가락을 위한 곡)이다. 러시아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체르니에 대하여 '훌륭한 음악교육자로서보다는 마음 가득히 열정이 넘치는 음악가이다'라고 말하며 존경심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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