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이해하기

오페라에 대한 50가지 흥미로운 사항들

정준극 2018. 9. 21. 11:30

오페라에 대한 50가지 흥미로운 사항들


1. 오페라(Opera)라는 용어는 음악, 미술, 무용, 연극 등이 종합된 예술분야를 말하지만 원래는 그냥 '작품'이라는 뜻에 불과했다. 라틴어의 작품이란 뜻의 단어인 Opus에서 나온 것으로 Opus의 복수형태가 Opera 이다. 미국에 '솝 오페라'(Soap opera)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오페라의 한 장르는 아니다. 낮시간에 가정주부들을 대상으로 한 신파조의 라디오 방송극로 시작한 것이다. 오페라의 내용도 대체로 신파조이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극을 오페라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미국에서 그런 신파조의 방송 드라마를 비누(Soap)회사들이 스폰서했기 때문에 'Soap Opera'라고 불렀다.


2. 오페라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다. 16세기 말엽에 플로렌스에서 한 무리의 화가, 음악가, 시인들이 모여 예술 분야에서의 르네상스를 이끌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스스로를 '플로렌스 카메라타'(Florentine Camerata)라고 불렀다. 카메라타는 작은 방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음악이 가미된 고대 그리스의 드라마를 부활시키기로 하고 그런 새로운 작품을 오페라라고 부르기로 했다. 갈릴레오의 아버지인 빈첸조 갈릴레이도 플로렌스 카메라타의 멤버였다.


3. 오페라라고 이름 붙인 작품으로 가장 처음 만들어진 것은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다프네'라는 것으로 1597년에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최초의 모던 오페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스 시대의 음악을 곁들인 연극에 비하여 새로운 음악극으로 간주한 것이다. '다프네'는 단번에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이 분실되어서 어떤 음악이었는지를 알수 없다. 다만, 음악이 연극에 부수적인 것이었다는 추측이다. 그렇다면 완벽한 모던 오페라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음악사상 최초의 오페라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오르페오'(L'Orfeo: 1607)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악보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오늘날에도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4. 최초의 오페라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서 자코포 페리의 '다프네'는 악보가 분실되어서 어떤 오페라인지 알수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최초의 오페라라고 단정 짓기가 어렵다는 입장들이다. 그래서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를 내세우고 있으나 실은 자코포 페리의 또 다른 오페라인 '에우리디체'(Euridice)가 있다. '오르페오'보다 7년 앞선 1600년에 공연되었다. 그리고 악보도 남아 있다. 문제는 '에우리디체'도 연극적인 성향이 강하고 음악은 부수적인 역할만을 한다는 것이어서 음악 위주의 온전한 오페라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우리디체' 이후에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만들어 냈고 그 오페라들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전파되어서 오페라의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간과할수 없는 일이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스타익스 강의 장면


5. 17세기에는 여자들이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것이 금지되었었다. 합창에서 노래 부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여성의 오페라 출연이 금지되었던 것은 토르디노나 극장(Teatro Tordinona) 사건 이후에 강화되었다. 토르디노나 극장은 로마에 있는 극장으로 실은 중세의 타워였으나 극장으로 개조하여 오페라 등을 공연하였던 곳이다. 토르디노나 극장은 나중에 아폴로 극장으로 명칭변경되었다. 토르디노나 극장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교황 클레멘트 10세는 이 극장이 대중들의 도덕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하여서 이 극장에서의 오페라 공연을 금지하였다. 그런데 실은 클레멘트 10세도 추기경들과 함께 이 극장의 로열석에 자주 모습을 보였었다. 클레멘트 교황은 여자들이 데콜레트 드레스를 입고 나와서 애교를 부리거나 질투를 하는 등의 연기를 하는 것을 보고 '이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여자들의 무대 출연을 금지하였다. 데콜레트 드레스란 여자들이 어깨와 목을 많이 드러낸 옷을 말한다. 그러자 이 극장을 후원하고 있던 크리스티나 여왕은 교황의 말을 '넌센스'라고 일축하고 여자들의 출연을 계속 진행했다. 그래서 교황과 크리스티나 여왕과의 사이가 나빠졌던 일이 있었다. 이것을 간단히 '토르디노나 스캔들'이라고 부른다. 결국 교황은 토르디노나 극장을 불태우라고 명령하여 더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6. 18세기에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를 공연할 때에 주인공들은 무대에서 대체로 발레의 제3 자세(포지션)로 서 있어야 했다. 발레의 제3 포지션이 어떤 것인지는 설명할 여유가 없지만 간단히 말해서 두 발을 약간 서로 겹치게 놓으며 손은 한 손을 위로 들고 있는 형태이다. 댜체로 이런 자세를 노래가 끝날 때까지 유지해야 했다. 오페라 성악가들은 발레도 배워야 했나보다.


7. 여성이 더 이상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여서의 역할은 카스트라티가 맡았다. 거세된 남자들로서 성악공부를 한 사람들을 말한다. 최초의 가장 인기있던 카스트라토는 발다사레 페리일 것이다. 너무나 유명해서 마차를 타고 지나가면 사람들이 몰려와서 마차를 꽃으로 장식했다. 수십리 밖에서도 발다사레 페리를 보기 위해 걸어온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8. 장 바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는 명실공히 프랑스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만큼 프랑스 오페라의 기초를 닦는 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였다. 륄리는 지휘할 때에 스틱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처음 시행하였다. 륄리에 의해 처음 등장한 지휘봉은 단장과 같은 크기로 끝은 뾰족한 편이었다. 군악대에서 사용하는 스틱과 같은 지휘봉은 륄리의 아이디어의 변신이다. 당시에는 커다란 지휘봉으로 바닥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었다. 그런데 륄리는 불행하게도 지휘봉으로 바닥을 치다가 잘못해서 자기 발을 찔렀고 그 후 상처가 덧나서 결국 목숨을 잃었다. 지휘봉 때문에, 더구나 자기가 개발한 지휘봉 때문에 목숨까지 잃은 경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자기의 지휘봉 때문에 세상을 떠난 장 바티스트 륄리


9. 샤를르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는 어쩐 일인지 티켓이 팔리지 않았다. 제작자는 표가 팔리지 않으면 여간 낭패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제작자는 파리 교외로 나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공짜로 표 몇장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파우스트' 공연의 티켓이 매진되었다고 소문을 냈다. 파리에 있는 오페라 팬들은 '그런 오페라를 보지 못하게 되면 곤란하다'고 말하며 매진되었다는 티켓을 구하기 위해 난리도 아니었다. 남아 있던 티켓은 정말로 모두 매진되었다. '파우스트'는 초연 이래 대 히트를 기록하게 되었다.


10. 모차르트의 오페라다운 첫 오페라는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이다. 모차르트가 12세 때에 완성한 것이다. 이 오페라는 장 자크 루소의 오페라적인 막간극인 '마을의 점장이'(Le devin du village)를 모방한 것이다. 그러고보면 모차르트도 모방에 소질이 많았었다.


11.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 그리고 독일의 징슈필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들을 자기만의 음악적 영감으로 변형시켰다. 그래서 어떤 음악학자들은 오페라의 역사를 얘기할 때에 '프리 모차르트'(Pre-Mozart: 모차르트 이전)와 '포스트 모차르트'(Post-Mozart: 모차르트 이후)로 분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2. 베토벤은 단 한 편의 오페라를 남겼다. '휘델리오'이다. 대단히 인도주의적인 오페라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이 한편의 오페라를 끝까지 완성하기 위해 11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서곡도 여러번이나 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레오노레 서곡'이 세편이나 있는 것이다. '휘델리오'는 1805년 비엔나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베토벤의 청각이 악화되기 시작한 해였다.


'휘델리오'에서 감옥의 장면. 로열 오페라 하우스


13. '휘델리오'라는 제목은 나중에 붙인 것이고 처음에는'레오노레'라는 제목을 붙였었다.  그래서 레오노레라는 타이틀의 서곡이 세 편이나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이 '레오노레' 대신에 '휘델리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이미 '레오노레'라는 오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1804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페르디낭 파에르가 작곡한 '레오노라'이다. 베토벤은 '휘델리오'의 부제를 '부부의 사랑'(Die eheliche Liebe)이라고 붙였다. 원작의 제목인 장 니콜라스 부일리의 '부부의 사랑'(L'amour conjugal)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14. 바그너의 '발퀴레'(Die Walkure)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驥行)'(Walkurenritt: Ride of the Valkyries)는 너무나 유명해서 영화 또는 TV 쇼의 음악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할리우드 영화인 '지옥의 묵시록'(Apocalypso Now)이다. 미군 병사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전투하러 떠날 때에 스피커로 크게 나온다. 베트콩들에게 공포심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옥의 묵시록' 영화 포스터


15.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 규칙이나 구조를 무시하고 가히 혁명적인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는 특히 라이트모티프(Leitmotif), 즉 주도적인 테마음악을 창조하여서 사용하였다. 각 주인공에 해당하는 별도의 주제 음악을 말한다. 바그너의 라이트모티프 테크닉은 훗날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다. 예를 들어서 '스타 워스'에서는 프린세스 레이아, 루크 스카이워커, 오비 완 케노비, 요다 등에 해당하는 별도의 주제 음악이 사용되었다.


16. 오페라의 공연이 끝나면 관중들은 주인공들에게 브라보(Bravo)라고 외치는데 실은 브라보는 남자 주인공에게만 보내는 환호이다. 여자 주인공에게는 브라바(Brava)라고 외치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박수를 받을 사람이 두명 이상이면 브라비(Bravi)라고 해야 한다. 여러명의 여자 출연자들에게는 '브라베'(Brave)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저 한사람이건 여러명이건, 남자이건 여자이건 관계없이 브라보라고 소리치고 있다. 할수 없다.


17. 일반적으로 오페라가 끝난 후에 휘파람을 부는 것은 박수 또는 환호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유럽 극장에서의 휘파람은 야유를 뜻한다. 미국에서 '부'(Boo)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홱하는 강한 휘파람으로 박수갈채를 대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18. 윌렴 발프(William Balfe)라고 하면 오페라 '보헤미안 걸'(The Bohemian Girl)의 작곡가로서 유명하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대리석 홀에 있었던 꿈을 꾸었어요'(I dreamt I dwellt in marble halls)는 대단히 사랑받는 아리아이다. 그는 이밖에도 여러 아름다운 오페라와 칸타타 등을 작곡했다. 그런데 발프는 작곡가가 아니라 테너로서 처음 음악계에 데뷔했다. 뛰어난 테너였다. 밀라노와 베니스에서 로시니의 '오텔로'의 타이틀 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알마비바 백작, 벨리니의 '청교도'에서 아르투로를 맡아 큰 인기를 끌었다. 하이든과 슈베르트도 노래를 잘 불렀지만 그건 소년시절의 이야기이고 청년이 되어서 오페라의 주역을 맡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발프는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기 전에 벨칸토 테너로서 이름을 떨쳤다. 발프는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과 콤비가 되어 출연한 경우가 많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한이 없었다. 발프에게 오페라 작곡가가 되라고 적극 권유하고 임프레사리오를 소개해 준 사람도 마리아 말리브란이었다. 발프는 말리브란을 위해서 오페라를 작곡했다. 1836년에 초연된 '아르투아의 처녀'(The Maid of Artois)이다. 이 오페라에서 남녀 주역은 말리브란과 발프가 맡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리브란은 이듬해인 1837년 9월에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발프는 말리브란을 위해 Sempre pensoso e torbido라는 칸타타를 작곡해서 헌정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메조소프라노 마리아 말리브란.


19. 푸치니의 '나비부인'(Madama Butterfly)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 중의 하나이다. 미국에서는 어느 해에 미국 전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오페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런데 1904년의 초연은 대실패였다. 그것도 세계오페라의 랜드마크라고 하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였다. 관중들은 새소리, 송아지 소리, 염소 소리를 내면서 야유를 멈추지 않았다. 이유야 많지만 주역을 맡는 성악가들의 캐스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연약한 모습의 초초상이어야 하는데 누가 보더라도 거의 만삭인 여인이 초초상을 맡아서 헉헉 댔던 것이다. 관중들은 그 소프라노가 지휘자와 섬싱이 있어서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열심히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그 지휘자는 클레오폰테 캄파니니(Cleofonte Campanini)라는 사람이었고 초초상은 로지나 스토르키오(Rosina Storchio)였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참사도 있었다.


20. 밀라노의 라 스칼라는 관중들을 만족시키기가 대단히 어려운 극장으로 소문나 있다. 관중들은 주인공이 제대로 완벽하게 노래를 부를 때까지 야유와 환호를 번갈아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가하면 주인공이 어떤 아리아를 대단히 훌륭하게 불렀다면 앙코를를 연호하여서 또 부르게 하고, 또 멋있게 부르면 다시 앙코르를 하여서 더 부르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경우에는 잘 알려진 아리아나 합창을 관중들이 함께 부르는 일도 있다.


21. 오페라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혹 음악이 곁들이는 연극을 오페라의 시조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약 2천년 전에 헤브세드(Heb-Sed)라는 공연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오페라의 선조라는 주장이다. 헤브세드는 '꼬리의 축제'라는 뜻이다. 헤드세드 공연은 그후 종교극(Passion play)으로 발전하였다. 이집트의 영광스런 과거의 이야기를 음악을 곁들여서 공연하는 것이다.


22. 중세에 교회에서는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성경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며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극에 종교음악을 곁들이는 경우가 있다. 이같은 공연을 오페라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가장 유명한 교회 드라마는 Quem Queritis(누구를 찾느냐?)이다.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한 두어명의 여인들이 예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걱정을 하던 중에 어떤 흰 옷 입은 사람이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었다는 성경 내용을 연극으로 꾸민 것이다. 아무튼 이런 교회 드라마가 발전하여서 보다 극적이고 비종교적 내용의 오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중세의 고난연극(Passion play). 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연극으로 만들었다. '누구를 찾느냐?'는 가장 자주 공연되는 고난극의 주제였다. 음악도 결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오페라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림은 교회 앞 광장에서의 고난극 공연장면.


23. 모차르트는 1784년에 프리메이슨에 합류하였고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여러 칸타타들을 작곡했다. 오페라 '마술피리'도 프리메이슨과 연관이 있다.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에 프리메이슨의 이상인 지혜, 친교, 자연, 희생 등의 요소를 가미하였다. '마술피리'의 대본을 쓴 에마누엘 쉬카네더도 한때 프리메이슨이었다.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초연이 있은지 9 주후에 세상을 떠났다. 혹자는 모차르트가 프리메이슨의 비밀들을 오페라를 통해서 너무 많이 밝혔기 때문에 암살 당했다는 얘기를 했다.


24. 모차르트의 라이발이라고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너무나 시기한 나머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며 그같은 사실을 살리에리 자신이 고백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소문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더 푸쉬킨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서사시를 썼고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97년에 같은 제목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남의 죽음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것은 점잖치 못한 일이지만 그걸 바탕으로 오페라를 만든 것은 일단 관심을 가질말한 일이다.


25. 게타노 도니체티는 모든 오페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광란의 장면'을 만들었다. '람메무어의 루치아'에서이다. 결혼 첫날 밤에 남편을 칼로 살해하고 피묻은 옷을 입은채 사람들 앞에 나와서 정신이 나간채 아리아를, 그것도 보통 보다도 상당히 긴 아리아를 부르는 것은 당시의 오페라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후에 오페라에 광란의 장면들이 간혹 등장한 것은 순전히 도니체티의 기여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도니체티 자신이 말년에 정신이상이 생겨서, 다시 말해서 미쳐서, 정신병원에서 상당기간을 지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도니체티의 정신이상의 원인은 매독이었다고 하니 그것도 놀랄 일이다.


26. 엔리코 카루소라고 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너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더구나 형제자매가 모두 21명이나 되는 집에서 태어났다. 카루소는 18번째였다. 이렇게 많은 아이들 중에서 성년이 되기까지 자란 아이는 세명 뿐이었고 그 중의 하나가 카루소였다. 카루소는 어릴 때 집안을 돕기 위해 기계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지 않는 때에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이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런 그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오페라 테너가 되었다.


27. 20세기에 들어와서 오페라의 아리아들이 팝 음악으로 만들어져 말할수 없는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가장 인기를 끈 오페라 아리아의 팝 송은 델라 리즈가 부른 Don't you know이다. 푸치니의 '라 보엠'에서 뮤제타가 부르는 '내가 길을 거닐 때'(Quando m'en vo': 일명 뮤제타의 왈츠)를 팝송으로 만든 것이다. 또 하나는 재키 윌슨의 히트송인 '나이트'이다.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에서 델리라의 아리아인 '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Mon coeur s'ouvre à ta voix)을 팝송으로 만든 것이다.


'라 보엠'에서 '내가 거리를 거닐 때'(뮤제타의 왈츠)를 부르는 뮤제타. 루마니아 뷰쿠레스티 오페라.


28. 오페라 성악가들 사이에서도 라이발이 많고 서로 다투는 일이 많지만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라이발인 파우스티나 보르도니와 프란체스카 쿠쪼니의 경우는 유별난 라이발 관계이다. 두 사람이 런던에서 같은 무대에 섰을 때 너무나 서로를 미워하는 나머지 무대에서 머리를 끄잡아 당기고 주먹으로 얼굴을 치는 난투극을 벌인 일이 있다. 관중들은 그것도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사태를 파악하고 나서는 한없는 야유를 보냈다.


29. 밀라노나 비엔나가 세계 오페라의 중심지가 되기 전에는 베니스가 그런 역할을 했다. 베니스에는 역사상 최초의 일반 대중을 위한 오페라 극장이 문을 열었다. 베니스의 오페라 극장에 더 할수 없는 활기를 불어 넣어준 사람은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하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였다. 몬테베르디는 베니스를 오페라의 중심 도시로 만든 주역이었다. 몬테베르디는 대화 중심의 오페라를 보다 음악적인 오페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


30. 오페라의 음악은 수많은 인기 영화 또는 광고 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페라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레오 들리브의 오페라 '라크메'(Lakme)에 나오는 '꽃의 2중창'(Sous le dome epais)은 마이클 더글라스, 아네트 베닝, 마틴 쉰이 주연한 '어메리칸 프레지덴트'에 나온다. 안젤리나 졸리, 제랄드 버틀러, 노아 테일러 등이 주연한 '툼 레이더: 판도라의 상자(Tomb Raider: The Cradle of Life)에, 벤 스틸러, 로버트 드 니로, 테리 폴로 등이 주연한 '부모 만나기'(Meet the Parents) 등에서도 '꽃의 2중창'을 들을수 있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음악은 '꼬마 돼지 베이브'(Babe: the Pig  in the City), 로버트 듀발, 티아 레오니 등이 주연한 '딥 임팩트(Deep Impact), '주만지'(Jumanji), 다이안 레인, 라울 보바 등이 주연한 '투스카니의 태양'(Under the Tuscan Sun) 등에 나온다. 광고에 나오는 대표적인 오페라 음악으로는 핸델의 '세르세'의 음악이 AT&T의 광고에 나오며, 바그너의 로엔그린 음악이 '듀퐁'(Du Pont)의 광고에,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의 음악이 '크라프트(Kraft)'의 광고에, 비제의 '카르멘'의 음악이 펩시(Pepsi)의 광고에 나오는 것 등이다.


31. 기독교에 바탕을 둔 종교적 내용의 오페라는 기독교 국가들에서 대체로 무난한 반응을 얻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다. 지나치게 에로틱하고 끔찍한 살인을 내용으로 삼은 경우에 특히 그러하다. 대표적으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Salome)이다. 근친상간, 누디즘, 살인, 그리고 특히나 살로메가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의 얼굴에 키스를 하는 장면은 종교적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래서 '살로메'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지나친 선정성 및 폭력성으로 공연금지가 되었었다.


32. 오페라 극장들은 요즘에야 안락한 좌석에 최첨단 음향과 조명 등으로 최고의 공연을 감상할수 있지만 오페라 극장의 초기에는 모든 여건이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대체로 1층의 오디토리엄에는 의자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 서서 관람해야 했다. 어떤 극장에서는 1층의 오디토리엄에 오페라를 공연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도박판을 개설해서 관객들이 여흥을 즐길수 있도록 배려한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촛불이나 가스불로 조명을 해야 했다. 등불에서 나오는 매연과 사람들의 호흡으로 인한 공기, 그리고 특히 남자나 여자를 불문하고 향수들을 뿌리고 오는 바람에 역겨운 냄새까지 가미되어서 극장 안은 그야말로 지독한 냄세의 혼합장소였다. 게다가 통풍장치도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것이 일반이었다. 그야말로 오페라 극장 안은 무질서와 비위생의 장터였다.


33. 바그너의 링 사이클인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잘 아는 대로 네 편의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오페라들은 대체로 개별적으로 공연된다. 그러나 바그너는 네 편의 오페라가 서로 연속이므로 한번에 공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어떤 오페라 극장이 바그너의 주장을 실현키로 했다. 실제 공연시간만 14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여기에 휴게시간과 식사시간을 4시간을 할애했다. 그리하여 오후 2시에 시작한 '니벨룽의 반지' 전편 공연은 밤을 꼬박 새워서 공연되었고 마침내 이튿날 아침 8시쯤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성악가들과 오케스트라 및 스태프들이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던 공연이었다. 바그너는 '링 사이클'을 무려 30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완성했다. 그러므로 하루밤을 꼬박 새야하는 공연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니벨룽의 반지'는 북구의 신화를 바탕으로 삼은 내용이다. 그리고 톨키엔의 '반지의 제왕' 3부작과 내용에 있어서 유사함이 많다.


'반지의 제왕' 3부 포스터


34. 바그너가 그의 작품만을 공연하는 극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트슈필하우스(Bayreuth Festspielhaus)이다. 바그너 신봉자들로서는 바이로이트가 성지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해마다 수많은 바그너 신봉자들이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이 바이로이트를 찾아와서 '링 사이클'의 한 편이라도 보고 간다. 독일의 구석진 작은 마을이던 바이로이트는 바그너 신봉자들로 인하여 성지가 되었고 그 때문에 마을 경제가 부흥되었다.


35. 1859년에 바그너는 '음악에 있어서 유태인'(Jewry on Music)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한 바 있다.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내용이다. 훗날 히틀러가 바그너의 이 에세이를 읽고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바그너는 유태인 작곡가의 작품을 어쩔수 없이 지휘할 때에는 흰 장갑을 끼고 지휘한 후에 벗어던졌다고 한다. 실제로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휘할 때에 그랬었다고 한다. 그런 바그너인데 그의 '파르지팔' 초연의 지휘를 유태인 지휘자인 헤르만 레비에게 맡겼다. 


36. 바그너의 '링 사이클' 전편은 순수 공연시간만 14시간이 걸리는 대하드라마이지만 반대로 너무나 짦은 오페라도 있다. 다리우스 미요의 '테세우스 해방'(The Deliverance of Theseus)라는 오페라로서 공연시간은 고작 7분이었다.


37. 누가 가장 많은 커튼 콜을 받았을까? 플라시도 도밍고는 1991년 7월 30일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서 베르디의 '오텔로'(Otello)의 타이틀 롤을 맡았다. 이때 관중들은 무려 1시간 20분 동안이나 도밍고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도밍고는 101회의 커튼 콜을 받이야 했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긴 박수갈채였다.


오텔로의 플라시도 도밍고


38.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1988년, 서울에서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베를린에서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의 네모리노를 맡았는데 165회의 커튼 콜을 받았다. 1988년 2월 24일이었다. 커튼 콜은 '오텔로'의 도밍고보다 많이 받았지만 시간은 도밍고보다 짧았다. 그래서 기네스의 세계기록은 도밍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39.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2년에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산 중국을 방문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을 미국의 존 애덤스(John Adams: 1947-)가 '중국에 간 닉슨'(Nixon in China)이라는 오페라로 만들었다. 이 오페라는 미-중간의 협력증진에도 기여한바가 있다. 그보다도 이 오페라는 미국 사람들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바람에 미국 전역에서 많은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너도나도 오페라를 통해서 중국의 상황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도 이 오페라는 음악사에 있어서 병렬주의(미니말리즘) 오페라의 중요한 이정표를 세워주었다는데에서 의의를 찾을수 있다.  

 

40. 요즘에야 여성 작곡가들의 오페라 작곡이 보편적이지만 중세 이후에는 그러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해서 여성 작곡가들의 오페라 작품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나듯 하였다. 그런 중에도 여성 작곡가들이 간혹 등장하여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여성 작곡가에 의한 최초의 오페라는 오페라 연혁에서 상당히 초창기인 1625년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1641)에 의한 '루지에로의 해방'(La liberazione di Ruggiero)이다.


41. 지금도 그렇겠지만 예전에도 박수부대라는 것이 있었다. 특히 18세기-19세기에 프랑스에서 유행하다시피 했다. 자기의 오페라가 공연되면 박수부대를 동원하여서 박수와 환호를 보내도록 하여 마치 대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런가하면 자기와 라이발에 있는 작곡가의 작품이면 역시 박수부대를 동원해서 야유와 비난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지지측과 반대측이 극장 안에서 충돌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런 박수부대를 프랑스에서는 클레이크(Claques)라고 불렀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객석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일어서서, 어떤 사람들은 앉은채 손을 흔들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이들이 야유부대, 또는 박수부대라고 하는 클레이크이다.


42. 어떤 오페라가 가장 자주 공연되었는지? 다시 말해서 어떤 오페라가 가장 사랑을 받는 것인지는 나라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다. 미국의 국립예술기금(National Endowment of the Arts: NEA)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7-2008년 시즌에 미국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오페라는 다음 순서와 같다. 라 보엠- 토스카- 라 트라비아타 - 피가로의 결혼- 카르멘- 돈 조반니 - 사랑의 묘약 - 마술피리 - 아이다 - 나비부인 - 투란도트.


43.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코미디 오페라의 금자탑이라고 할만큼 위대한 작품이다. 그런데 로시니는 이 오페라를 단 2주만에 완성했다.


44. 수많은 위대한 오페라들이 불후의 명작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셰익스피어의 '함렛', '로미오와 줄리엣', '막베스', '오텔로', '활슈타프' 등등을 위시해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월터 스콧의 '람메무어의 루치아',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씨', 존 밀튼의 '실락원' 등등 헤아릴수 없이 많은 오페라들이 세계적인 불후의 명작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오페라는 명작의 고향이다.


45.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들은 거의 모두 오페라를 남겼다. 베토벤도 남겼고 멘델스존, 슈만, 슈베르트 도 오페라를 남겼다. 그러나 몇 사람은 오페라에 도전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브람스와 말러이다. 이들이 활동할 당시의 비엔나는 밀라노, 파리와 함께 유럽 오페라의 중심지였다. 두 사람 모두 그런 비엔나에서 활동하였으며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한 우리는 서양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바흐도 오페라를 작곡했다. 커피 중독을 내용으로 삼은 미니 오페라이다.


46. 오페라 성악가로서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은 누구였을까? 남자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케(Luigi Lablache: 1794-1858)일 것이다. 185에 가까운 장신에 몸무게는 150kg이 넘는 거구였다. 그런 그가 어느때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사는 '배가 고파서 죽겠다'였다. 그가 그런 대사를 하자마자 관중들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여자 성악가로서 가장 장대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소프라노인 아말리 마테르나(Amalie Materna: 1844-1918)일 것이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키가 거의 180에 가깝고 몸무게 또한 100kg에 가까운 편이었다. 아말리 마테르나는 바그너 오페라의 주역으로서 대단히 적격이었다. 특히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 역할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아름답고 순수한 엘리자베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지만 아밀라 마테르나는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테크닉으로서 무대를 압도하여 한없는 박수를 받았다.


 luigi lablache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탄호이저'에서 엘리자베트역의 아말리 마테르나. 오른쪽은 베이스 루이지 라블라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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