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오페라 속의 세기적 미인들 4

정준극 2019. 3. 6. 18:27

오페라 속의 세기적 미인들 집중탐구 4


○ 중국 4대미인 중의 한 사람 시 쉬(서시) 


- 레이 레이(Lei Lei: 1952- )의 '시 쉬'(Xi Shi: 西施)


중국의 4대 미인. 왼쪽으로부터 서시(시 쉬), 왕소군(왕 자오준), 초선(디아오 찬), 양귀비(양 유후엔)


중국의 미인 시쉬(西施: 서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다못해 중국에는 '시쉬'라는 이름의 담배도 있다. 시쉬는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이다. 다 알고 있겠지만, 중국 역사상 4대 미인이라고 하면 물고기가 미모에 감동하여서 헤엄치는 것을 잊었고 물 표면에 머물고 있으면 물에 비친 서시의 모습을 볼수가 없으므로 물 아래로 내려갔다는 서시(浣魚 西施),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는 왕소군(落雁 王昭君), 달이 부끄러워서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閑月 貂蟬), 꽃이 부끄러워서 잎을 말아 올렸다는 양귀비(羞花 楊貴妃)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서시는 나라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구국의 영웅으로서 다른 미인들에 비하여 존경을 받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서양에 '트로이의 헬렌'이 있다면 동양에는 서시가 있다고 자랑한다. 모두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의 미인이었다. 한 나라를 기울이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미모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성어는 이로부터 생긴 것이다.

 

서시


서시는 저장성 저라산(苧蘿山) 인근의 시골에 살면서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여인이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월(유에: Yue: ) 왕 구천(꿔우 지안: 句踐: Gou Jian)은 오(: Wu: )왕 부차(푸 차이: 夫差: Fu Chai)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오왕 부차에게 이제는 절대로 대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이어 3년에 걸친 노예생활을 하는 등 말할수 없는 치욕을 당한다. 월왕 구천은 월나라에 돌아와서 그러한 치욕을 씻으려고 와신상담하기를 수년, 결국은 대부 종()의 책략에 따라 두 미녀인 시골에 살고 있는 서시(시쉬: Xi Shi: 西施)와 정단(쳉단: Zheng Dan: 鄭旦)을 데려와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여러가지 기예를 가르친 후 재상 범려를 사신으로 하여 오왕 부차에게 두 여인을 바친다. 오왕 부차는 처음에는 월왕의 의도를 의심하지만 두 여인 중에서 차츰 서시의 미모와 재능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보다 못한 충신 오자서(Wu Zixu: 伍子胥)가 서시를 내치라고 주장하며 월왕 구천을 더욱 압박하라고 계속 간언을 하자 오히려 오자서의 간언을 듣기 싫어하여 그를 죽인다. 월왕 구천은 오자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기원전 473년에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과거의 모든 원한을 설욕한다.



서시는 오나라가 멸망하자 궁궐에서 월나라의 옷을 입고 기다리면서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월왕 구천의 왕비는 사시가 고향으로 돌아오면 혹시 월왕이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자기를 내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서시를 멀리 추방한다. 일설에는 서시가 자기의 임무를 다하였다고 생각하여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오페라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방향을 돌려 놓았다. , 서시가 월나라의 영웅으로서 존경을 받고 조용하게 여생을 보낸다는 내용으로 바꾸었다. 서시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는 중국의 레이 레이(Lei Lei: 1952-)가 작곡했다. 레이 레이는 센양음악학원을 졸업한 재능있는 작곡가이다. 센양은 과거 만주시대에 봉천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오페라 '시쉬'는 2009년 베이징에서 초연되었다. 이어 이듬해인 2010년에는 80일간의 중국 오페라 축제의 오프닝 작품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주인공은 시쉬의 역은 첸 추오황, 센 나, 수 샤오잉이 맡았다. 중국 고대 전설을 서양 오페라로 만든 첫번째 케이스라고 한다.  


'서시'의 무대


○ 영국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게 만든 앤 볼린


-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안나 볼레나'(Anna Bolena)


영국 튜도 왕조의 헨리 8세라고 하면 여섯 번이나 결혼하여서 여섯명의 왕비가 있었던 유명한 인물이다. 여섯 명의 왕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가 두번째인 앤 볼린(Ann Boleyn)이다. 영화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바로 그 앤 볼린이다. 앤 볼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하고 나서 약 3년 동안 왕비로서 지냈다. 헨리 8세가 여섯 번이나 결혼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다음 왕위를 이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앤 볼린은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아들을 하나 낳기는 낳았는데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딸 하나가 살아 남아서 있었다. 그 딸이 훗날 영국 역사에 길이 남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었다.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은 아라곤(스페인)의 캐서린(카타리나) 공주였다. 그런데 캐서린 공주는 어릴 때에 영국과 스페인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헨리 8세의 형인 아서와 정혼하였으며 16세가 되자 런던에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아직도 왕자였던 남편 아서는 결혼하고 나서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얼마후 아서의 아버지 헨리 7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서의 동생인 헨리가 헨리 8세로서 영국 왕이 되었다. 헨리는 영국과 스페인의 동맹을 고려하여 형수였던 아라곤의 캐서린과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그래서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첫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헨리 8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딸만 하나 생겼고 아들은 두지 못했다. 헨리 8세는 아들을 얻기 위해 다른 여자와 결혼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후보자로 등장한 여인이 앤 볼린이었다. 헨리가 앤과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생략코자 한다. 본 블로그의 '헨리 8세와 여섯 명의 왕비'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나 볼레나(앤 볼린)


그런데 헨리 8세가 앤 볼린과 결혼하자면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정식으로 이혼해야 했다. 당시 영국의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고 군왕이 이혼하거나 재혼하려면 로마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은 이혼을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부부인데 사람들 마음대로 이혼한다는 것은 거룩한 결혼을 경시하는 것이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헨리 8세가 캐서린과 이혼하고 앤 볼린과 재혼하려면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당시 교황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황은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눈치를 보는 편이었다. 헨리 8세는 바티칸이 그렇게 나오자 속이 상해서 영국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탈퇴토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교회의 수장은 교황이 임명하는 성직자였으나 교회가 정치에 참여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이제로부터는 왕이 교회의 수장도 겸하는 것으로 확정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교회의 수장은 영국의 왕, 즉 현재로서는 엘리자베스 2세로 되어 있다. 아무튼 영국교회가 가톨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별도의 교회, 즉 우리가 보통 성공회라고 부르는 앵글리칸 처치로 대변혁을 갖게 된 사실상의 배경은 헨리 8세가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나 볼레나와 엔리코(헨리)


앤 볼린은 과연 세계의 역사를 흔들만큼 뛰어난 미인이었는가? 별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현재 남아있는 앤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매력적인 여인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주부와 같은 모습이다. 앤이 30세쯤 되었을 때 초상화를 그린 어느 화가는 앤에 대하여 ‘그다지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보통 키에 건강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얼굴은 가무잡잡한 편이었고 목은 길었다. 입은 큰 편이었으나 가슴은 그다지 솟아오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눈은 아름다웠다’ 라고 말했다. 그 화가가 앤을 좋아해서 그렇게 말했는지, 또는 싫어해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매력적이기는 했던 것 같다. 헨리 8세도 어느 때 ‘완전히 마녀에게 당한 느낌이다’라고 불평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마녀에게 당했다고 하면 그건 바꾸어 말하여 앤이 사악하기는 했지만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반증이다. 앤을 그린 초상화는 여러 개가 있다. 사진이 없었던 시절에는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늠하는 수단으로 초상화가 유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초상화도 그리는 사람의  재능이나 마음에 따라 달라질수 있다. 평소에 싫어하는 사람을 그린다면 좋지 않게 그릴 것이고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을 그릴 것 같으면 멋있게 그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나 볼레나와 엔리코. 사냥 장면


오페라 '안나 볼레나'(앤 볼린의 이탈리어어 표기)는 1830년 12월 30일에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도니체티의 첫 성공작이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장면마다 넘쳐 흐르는 벨칸토 오페라이다. 주인공은 안나 볼레나이며 콤프로마리오는 조반나 세이무어(제인 세이무어)이다. 근자에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가 프리마 돈나와 콤프로마리오를 맡아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오페라 '안나 볼레나'의 대본은 당대의 펠리체 로마니가 썼다. 그는 이폴리토 핀데몬테의 희곡인 '엔리코 8세와 안나 볼레나'(Enrico VIII ossia Anna Bolena)와 알레산드로 페폴리의 극본인 '안나 볼레나'를 바탕으로 하여 도니체티를 위한 오페라의 대본을 만들었다. '안나 볼레나'는 도니체티의 튜도 왕조의 이야기를 다룬 네편의 오페라 중 하나이다. 나머지 세편의 오페라는 '케닐워스 성'(Il castello di Kenilworth),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로베르토 드브러'(Roberto Devereux)이다.


안나 볼레나(안나 네트렙코)와 조반나 세이무어(엘리나 가란차). 메트로폴리탄


○ 가장 아름다웠던 왕비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엘리자베트


-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의 오페라/오페레타 '씨씨'(Sissi)


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부인이며 나중에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대타협을 통하여 하나의 우산 아래에 결속하게 되자 헝가리 왕국의 왕비까지 겸한 엘리자베트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왕비일 것이다. 그래서 탐미적인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엘리자베트를 모차르트나 요한 슈트라우스만큼이나 사랑하고 존경한다. 오스트리아는 1차 대전을 직접 일으킨 주인공이었으며 2처 대전에 있어서도 배후의 주인공이었다. 왜냐하면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출신이기 때문이며 유태인 집단학살에 가장 앞장 선 아돌프 아이히만도 오스트리아 출신이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가 1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는 바람에 황제의 손자뻘이 되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위 계승자가 되었고 그가 사라예보를 시찰하다가 세르비아 국수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결국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으며 이어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엘리자베트 왕비의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이 1차 대전의 보이지 않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물론 루돌프 황태자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왕비의 보이지 않는 역할도 한 작용했다고 본다.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의 작품. 엘리자베트 황비'


'씨씨'라는 애칭의 엘리자베트 왕비는 바바리아 출신으로서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결혼하였다. 합스부르크라고 하면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왕가였다. 그런데 합스부르크는 가문의 명예와 존엄성을 유지보존하기 위해서 가까운 친척과의 결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합스부르크의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들도 얼굴이 못생긴 것이 일반이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하면 눈이 툭 튀어나왔다든지 턱이 상당한 주걱턱이었고 입술이 기형적으로 두텁다는 것 등이다. 그런 여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왕비들로서 오랜 역사와 함께 지내왔다. 그러나 엘리자베트의 경우는 달랐다. 합스부르크 출신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무척 아름다웠다. 더할수 없는 미모에 날씨한 몸매였다. 엘리자베트 왕비가 생존하여 있을 때에는 사진이 있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린 초상화들도 있지만 사진도 남아 있다. 사진이건 그림이건 엘리자베트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답고 우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다. 불행하게도 엘리자베트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61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오늘날 오스트리아에 가보면 그의 모습을 담은 기념품들이 상점마다 넘쳐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엘리자베트 왕비에 대한 추억으로 오페라 '씨씨'를 작곡했다. 오페레타 '씨씨'는 1932년 12월 23일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되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베토벤의 '휘델리오',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 등이 초연된 유서 깊은 극장이다. 오페레타 '씨씨'는 바바리아의 뷔름제에 있는 포센호펜 궁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는 엘리자베트 공주의 모습과 그후 1853년에 오스트리아의 바드 이슐에서 청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로부터 청혼을 받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그러므로 루돌프 황태자의 이야기 등등은 나오지 않는다.


바드 이슐에서 프란츠 오제프 황제의 청혼을 받는 엘리자베트(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