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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여인 열전 - 1

정준극 2022. 8. 29. 06:38

위대한 남성들의 뒤에는 위대한 여성들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의 이 말이 과연 우리가 존경하여 마지않는 위대한 작곡가들에게도 해당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들도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을 경험한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도 어떤 작곡가들은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아서 이혼을 하거나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들의 면모를 일부나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것도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혼한 바흐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첫 번째 부인은 바흐가 23세 때에 결혼한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 1684-1720)입니다. 바흐는 많은 자녀를 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날’(Father’s Day)에는 바흐를 상징적으로 등장시킵니다. 훌륭한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바흐는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를 두었고 두 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와의 사이에서는 열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린이의 생존비율이 낮아서 도합 스므 명의 자녀 중에서 열 명 밖에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는 실은 바흐의 아버지의 사촌인 요한 미하엘 바흐의 딸 즉, 바흐와는 조카가 되는 촌수입니다. 우리식으로 보면 바흐는 마리아의 당숙입니다. 마리아가 바흐보다 한 살 위였습니다. 마리아는 1707년부터 172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3년간 바흐의 부인이었습니다.

 

바흐의 첫번째 부인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가족 음악회 

 

바흐는 17205월에 그를 고용한 레오폴드 공자와 함께 독일 남부의 칼스바드에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전화시설이 없어서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서도 자주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바흐가 두 달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 마리아는 질병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더구나 매장까지 마친 상태였습니다. 바흐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한 것에 대하여 매우 후회하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고작 35세였습니다. 바흐는 마리아에 대한 비통한 심정으로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D 단조의 마지막 악장인 샤콘느를 완성했습니다. 이 곡은 기악곡 중에서도 가장 심오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흐는 이듬해인 1721년 소프라노이며 필사가(Transcriber)인 안나 막달레나와 기다렸다는 듯이 결혼했습니다. 안나 막달레나는 바흐가 1717년부터 몇 년 동안 안할트 쾨텐 공국의 음악감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소프라노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안나 막달레나는 1701년에 태어났으니 바흐보다 16년 아래였지만 사랑에는 나이가 관계없었습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성실한 바흐가 아내가 있는 중에 다른 여자와 좋아 지냈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사항이니 무어라 할수 없습니다.

 

안나 막달레나

 

부인 이외에 다른 여인을 평생 사랑한 하이든

 

혹자는 하이든의 부인 마리아 안나도 어쩐 일인지 악처 열전에 포함하고 있지만 하이든의 부인은 못된 악처라기보다는 미련한 부인, 즉 우처(愚妻)에 속합니다. 마리아 안나는 세상이 존경하는 위대한 '파파 하이든'의 부인이었지만 음악은 하나도 모를 뿐만 아니라 주책없는 일만 골라서 했기 때문에 하이든이 싫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하이든이 새로 작곡한 악보 뭉치를 불쏘시개로 사용한 것 등입니다. 그리고 물론 결혼하게 된 사연도 심상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보다도 하이든 같은 점잖고 신앙심이 높은 분이 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 그것도 이탈리아 출신 유부녀를 대단히 좋아해서 일설에는 아들까지 두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하이든은 카펠마이스터라는 안정된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했습니다. 하이든은 테레제(Therese)라는 여인을 사랑해서 결혼까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테레제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언니가 있는데 동생인 테레제가 먼저 결혼하는 것은 안 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이든에게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면 큰 딸과 결혼하라고 종용했습니다. 당시 언니인 마리아 안나는 어떤 유부남을 좋아해서 죽자 사자 했는데 마리아 안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그 꼴을 볼수 없어서 다른 남자한테 어서 시집보내고자 벼르고 있었던 터에 마침 하이든이 나타나서 둘째 딸과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시집 못간 큰 딸 문제를 착한 하이든에게 넘기고자 그렇게 강요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씨 착한 하이든은 결국 큰 딸인 마리아 안나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하이든과 마리아 안나의 결혼생활이 행복할 이유가 없었다.

 

하이든의 부인마리아 안나

 

부인이 싫다보니 자연히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예쁘게 생기고 애교가 있는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가 대상자였습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를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일을 할 때에 처음 만났습니다. 하이든은 소프라노인 루이지아를 사랑하여서 안나와 이혼하고 루이지아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가톨릭의 규범에 의하면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거나 정신병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시설에 수용되어 있지 않는 한 이혼은 꿈도 못 꾸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이든과 루이지아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연의 관계로서 무려 10년 이상을 지냈습니다. 루이지아가 아이젠슈타트에 와서 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습니다. 루이지아는 아이젠슈타트에 있으면서 둘째 아이인 안토니오를 낳았습니다. 루이지아는 안토니오가 하이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으며 루이지아의 남편인 안토니오도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하이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어찌된 셈인지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은 이탈리아로 돌아간 루이지아와 계속 연락을 하며 지냈는데 가끔씩 돈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에 마리아 안나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자 그 소식을 들은 루이지아는 하이든에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다음과 같은 문서를 적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내용인즉, "아래에 서명한 본인은 루이자 폴첼리에게 약속하노니 만일 본인이 재혼을 생각한다면 루이자 폰첼리 이외의 다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재혼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낸다면 본인이 죽은 후에 3백 굴덴의 연금을 루이자 폴첼리에게 남길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이든은 루이지아 폴첼리와의 약속을 지켜서 재혼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든의 애인 루이지아 폴첼리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한 콘스탄체

음악의 신동모차르트의 부인은 콘스탄체(Constanze)입니다. 콘스탄체의 아버지는 프리돌린 베버라는 사람으로 베이스이면서 배우였습니다. 프리돌린 가족은 독일의 만하임에서 살다가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 비엔나로 왔습니다. 한편, 프리돌린 베버에게는 이복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누군가 하니 저 유명한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였습니다. 그러니까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는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조카가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모차르트가 칼 마리아 폰 베버와 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프리돌린 베버에게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 무슨 연유인지 딸들은 모두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큰 딸 요제파(Josepha)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서 나중에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가 초연을 했을 때 밤의 여왕의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딸이 알로이지아(Aloysia)로서 비엔나에 와서 오페라에 자주 출연해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알로이지아가 만하임에 있을 때 모차르트도 만하임에 순회연주를 하러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 알로이지아를 알게 된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를 좋아해서 결혼하자고 졸랐지만 알로이지아는 모차르트가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해서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콘스탄체 모차르트

 

비엔나에 온 프리돌린 베버는 이런 저런 일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더구나 병에 걸려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망인인 세실리아 베버 여사는 네 딸들을 데리고 먹고 살기 위해 방 하나를 하숙방으로 내놓았습니다. 마침 비엔나에 와서 방을 구하던 모차르트는 우연히 세실리아의 하숙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기에서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가깝게 지내게 되어 결국 결혼까지 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자녀를 두었으나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놓아서 네 자여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만 장성했지만 어쩐 일인지 두 아들이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결국 모차르트의 후손은 없게 되었습니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저런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결혼 생활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모차르트가 비록 주위에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콘스탄체를 대단히 사랑했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얼마후 덴마크 외교관인 게오르그 폰 니센이란 사람과 재혼을 했습니다. 폰 나센이란 사람은 모차르트 숭배자여서 훗날 모차르트 전기를 출판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면 모차르트가 처음에 결혼하겠다던 알로이지아는 어떻게 되었을 까요? 모차르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린 1782년 바로 그 해에 비엔나 궁정극장의 배우인 요제프 랑게라는 사람과 결혼했습니다. 모차르트는 알로이지아를 위해서 많은 아리아들을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1788돈 조반니가 초연을 가졌을 때 돈나 안나의 역할을 맡기기까지 했습니다. 알로이지아는 1785년부터 1788년까지 비엔나에서 리바이발된 후궁에서의 도주에서 주인공 콘스탄체를 맡아 출연했고 모차르트의 사후인 1795년에는 역시 티토의 자비의 비엔나 공연에서 세스토를 맡은바 있습니다.

 

 

청혼을 거절당한 베토벤

온 인류로부터 악성(樂聖)이라고 까지 추앙받는 위대한 베토벤도 사랑에 있어서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아픔과 실패를 겪었습니다. 잘 아는 대로 베토벤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손이 없습니다. 베토벤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으며 훌륭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여인들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베토벤은 피아노 선생으로서 귀족 집안의 여식들을 가르친바 있습니다. 그러던 중 비엔나의 부유한 상인으로서 나중에 황실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야콥 프리드리히 말파티의 딸인 테레사(Theresa Malfatti: 1792-1851)의 피아노 선생을 맡게 되었습니다. 테레사는 베토벤보다 21세 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테레사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바가텔레 25A 단조인 Für Elise(엘리제를 위해서)를 테레사를 위해서 작곡했다고 합니다.

 

테레사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안나는 베토벤의 친구인 이그나스 폰 글라이헨슈타인이란 귀족과 결혼했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베토벤은 테레사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습니다. 테레사는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아마 베토벤의 신분이 낮고 볼품없는 인물에 재산도 없다는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베토벤의 상심은 컸습니다. 1810년에 베터벤은 테레사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습니다. ‘Now fare you well, respected Theresa. I wish you all the good and beautiful things of this life. Bear me in memory, no one can wish you a brighter, happier life than I even should it be that you can not al all for. Your devoted servant and friend Beethoven.’ 해석은 각자가 해 보세요.

 

베토벤이 사랑해서 청혼까지 했던 테레사 말파티

 

슈베르트의 결혼도 미완성

가곡의 왕프란츠 슈베르트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도 한 때는 결혼을 신중하게 생각한바 있습니다. 상대여인은 소프라노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였습니다. 슈베르트의 첫 사랑이었습니다. 슈베르트가 테레제를 만난 것은 16세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7세 때에는 테레제를 사랑하여 결혼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결혼할 남자가 재정적으로 가정을 운영할 충분히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결혼이 성사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테레제는 슈베르트보다 두 살 아래였으니 청혼을 받았을 때 15세의 소녀였습니다. 그러므로 당장 결혼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테레제의 아버지는 비단을 직조하는 일을 해서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테레제와 결혼하겠다는 슈베르트를 보니 나이도 어리지만 일정한 직업이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느라고 바쁜 주제여서 당연히 반대했습니다.

 

테레제의 집은 슈베르트의 집에서 아주 가깝습니다. 테레제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피아노는 물론이고 바이올린도 잘 연주하는 재주있는 소년이었습니다. 슈베르트는 테레제 남매를 자기 집으로 오라고해서 슈베르트의 가족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합주도 하는 즐거운 시간을 자주 가겼습니다. 그래서 슈베르트와 테레제가 더욱 가까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테레제와 결혼하려던 슈베르트의 꿈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얼마후 부터는 슈베르트가 매독으로 고생을 하게 되어 더 이상 결혼 얘기를 꺼낼 형편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슈베르트가 테레제에게 결혼하자고 했던 때로부터 3년이 지난 때에 슈베르트는 친구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을 정말 좋아했다. 그 여자도 나를 사랑했다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런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테레제도 슈베르트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하며 결혼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아무튼 슈베르트는 짧은 생애이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후손이 없습니다.

 

슈베르트가 결혼까지 생각했던 테레제 그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