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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여인 열전 - 3

정준극 2022. 10. 27. 11:51

파란만장의 바그너 러브 스토리

 

바그너는 서양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바흐, 그리고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는 베토벤에 이어 가장 위대하고 특별한 작곡가로 인정받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오페라와 관련해서는 오페라의 황제로서 존경받고 있는 베르디에 버금갈 정도로 오페라의 역사에서 일대 변혁을 일으킨 뛰어난 인물입니다. 바그너는 진실로 뛰어난 작곡가였습니다. 그러한 그였지만 대단한 여성편력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연애에 정신 나간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설마 위대하신 바그너 선생이 그럴 리가 있나?’라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바그너는 70평생을 통해서 여러 여인들과 좋게 말해서 연애를, 나쁘게 말해서는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여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 1809-1866))였고 두번째 부인은 프란츠 리스트의 사생아로서 14세 연하의 코지마(Cosima: 1837-1930)였습니다. 바그너가 코지마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던 때에 코지마는 피아니스트이며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코지마는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바그너와 동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정식 부부로서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어느덧 두 딸을 두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코지마를 사랑하였기에 친구의 부인인데도 동거생활을 해서 자녀까지 두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문제는 바그너가 코지마와 식도 올리지 않고 동거하는 중에도 다른 여자와 한눈을 팔거나 또는 세상이 다 아는 연애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바그너의 첫번째 부인 민나 플라너.

 

바그너는 70세에 가까운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캐리 프링글(Carrie Pringle: 1859-1930)이라는 20대 아가씨를 좋아해서 한눈을 팔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캐리 프링글은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재원으로 18827월 바그너의 '파르치팔'이 바이로이트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을 때 꽃 처녀들'(Flower maiden) 중의 한 사람으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어 무대에 섰던 여자였습니다. 그때 바그너는 69세였고 캐리 프링글은 23세였습니다. 바그너는 캐리 프링글을 보자마자 그 가녀린 아름다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되어 감탄과 함께 연애의 감정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그너는 파르치팔의 리허설 기간 중에는 물론 정작 공연에서도 캐리 프링글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그저 남이 듣던 말던 칭찬하는 말만 했습니다.

 

바그너의 연인 캐리 프링글

 

바그너가 캐리 프링글이라는 젊고 예쁜 소프라노에게 눈길을 주고 있다는 사실은 천부적인 연애선수인 코지마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지마도 남의 아내로 있으면서 바그너와 동거하며 지냈고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두 딸까지 낳은 입장이어서 무어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파르치발'의 초연을 마친 바그너는 사실 건강이 상당히 나빠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지마의 권유로 날씨가 좋은 베니스에 가서 요양키로 했습니다. 바그너는 파르치발의 초연이 끝나자 마지 할수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베니스로 떠났습니다. 바그너가 베니스로 떠나기 전에 한 일 중의 하나는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장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의 '파르치발'을 공연하든지 또는 다른 작품을 공연할 때에는 제발 캐리 프링글을 초청해서 주역으로 삼아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베니스에서 요양하면서도 캐리 프링글과 자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코지마는 바그너와 대판 다투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렇지 않아도 병약해진 바그너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아서 결국 이듬해인 18832월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바그너는 70세였습니다. 아무튼 캐리 프링글이라는 여인은 바그너 생애의 마지막에서 바그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으로 음악사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참고가 될지 모르지만 바그너의 여성편력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바그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필요한 사항일지 모르기 때문에 소개합니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대학교의 학생이던 18세 때에 레아 다비드(Leah David)라는 여학생을 죽어라고 사랑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름으로 보아서는 유태계 여인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레아가 바그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바람에 속이 상하고 헛물만 들이킨 채 물러났습니다. 바그너는 그때 레아 다비드와 결혼하지 못하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대단한 각오였지만 그건 생각뿐이었고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습니다. 바그너가 레아로부터 사랑을 거부당하자 그로부터 그의 반유태정서가 싹튼 것이 아니겠느냐는 짐작도 있습니다. 레아 다비드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 있은 후부터 바그너의 연애역사는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바그너는 레아 다비드와 헤어지고 나서 죽을 것처럼 난리를 피더니 1년이 지나자 완전히 잊어버리고 이번에는 제니 라이만이라고 하는 귀족 가문의 아가씨를 죽어라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도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바그너는 겨우 19세였습니다. 형편없는 가정의 바그너이기에 누구라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바그너는 21세 때에 드레스덴 출신의 여배우 민나 플라너를 보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바그너는 민나에게 미쳐서 무려 3년이나 쫓아다니며 결혼하자고 졸랐습니다. 민나는 바그너의 극성이 귀찮기도 하지만 바그너가 결혼해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마침내 바그너가 23세 때에 그와 결혼했습니다. 민나 플라너는 바그너보다 4년 연상이었습니다.

 

그런 바그너인데 민나 플라너를 죽자 사자 쫓아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기 소프라노인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Wilhelmine Schroeder Devrien: 1804-1860)을 사모하여 밤새 번민하는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바그너는 빌헬미네 슈뢰더 드브리앙을 여인 중에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생각하고 사모하였습니다(My ideal in art). 빌헬미네는 바그의 오페라 리엔치의 초연에서 아드리아노의 이미지를 창조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이미 빌헬미네는 배우인 남편 칼 드브리앙과 이혼한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성사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바그너가 부인인 민나가 어떤 군인과 좋아하다가 드디어 두 사람이 야반도주까지 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민나와 군인과의 관계는 좋게 말해서 사랑이었지만 나쁘게 말해서는 사기극이었습니다. 그 군인이 민나의 돈만 챙기고 야반도주 중에 혼자서 어디론가 사라졌던 것입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진 민나는 어쩔 수 없이 바그너에게 돌아왔습니다. 바그너는 그런 민나를 너그럽게 받아 들였습니다.

 

바그너는 36세 때에 공화제를 요구하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당국의 수배인물이 되었습니다. 바그너는 선배 겸 친구인 프란츠 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체포직전에 스위스로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로서 이미 다른 사람의 부인이 되어 있는 코지마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지만 민나도 없고 코지마도 없는 스위스로 온 바그너로서는 그야말로 노 마크 찬스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바그너는 스위스에서 제시 라소(Jessie Lasso)라는 여인과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 출신인 제시 라소는 보르도에서 포도주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부유하게 지내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어찌하다가 바그너와 알고 지내게 되어 급기야는 애인으로 잠시나마 뜨거운 관계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바그너와 제시는 저 멀리 극동으로까지 가서 세상과 작별하고 둘이서만 살 결심까지 했다. 그러다가 극동은 너무 멀다고 생각해서 그리스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민나가 이 계획을 눈치 채고 제시의 친정어머니를 만나 설득하는 바람에 바그너와 제시의 도피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그너는 결국 민나에게 돌아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일단 민나에게 돌아간 바그너는 어쩐 일인지 민나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서 두 사람은 마치 결혼 전에 정열을 불태웠던 것처럼 지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바그너와 민나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은 것은 바그너와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6-1902)의 뜨거운 관계가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큰 원인이었습니다.

 

스위스로 도피한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살고 있는 베젠동크 부부와 알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인 오토 베젠동크는 비단무역을 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이었습니다. 부인인 마틸데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여류 시인이었습니다. 베젠동크 부부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의 후의로 그들의 저택에 있는 별채에서 머물면서 작곡생활을 했습니다. 바그너는 예쁘고 나긋나긋하며 상냥하고 예술에 대한 지성이 남다르게 뛰어난 마틸데 베젠동크를 사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뜨거운 관계로 인하여 바그너의 저 유명한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가곡'이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바그너의 최대 걸작인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마틸데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창조되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바그너와 마틸데의 관계는 당시 바그너의 정식 부인이었던 민나의 간섭 등으로 인하여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습니다. 바그너와 마틸데의 관계는 통상적인 친구, 또는 청년 작곡가를 후원하는 부유한 여인과의 관계라는 것을 뛰어 넘어 애틋하고 애절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입니다. 만일 두 사람이 서로 진실로 사랑하였다면 그것은 바그너는 물론이고 마틸데 베젠동크 부인에게 있어서도 평생 처음인 완성되고 숭고한 사랑이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바그너가 사랑했던 베젠동크 부인

 

그후 바그너는 49세 때에 마틸데 마이어라는 여인과 스캔들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프레데리케 마이어라는 여인과 밀회를 거듭하며 인생의 존재의미를 강조해 나갔습니다. 한편, 민나는 바그너와 별거하며 혼자 지내다가 바그너가 53세 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그너는 그 전부터 코지마와 서로 좋아지내다가 민나가 세상을 떠나자 아예 코지마를 집으로 들어와서 살게 했습니다. 코지마는 그동안 바그너와 지내면서 낳은 두 딸을 데리고 바그너의 집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코지마는 아직 법적으로는 지휘자인 한스 폰 빌로브의 부인이었습니다. 코지마와 한스 폰 빌로브의 이혼이 겨우 성립된 것은 1870, 바그너가 57세 때였습니다. 그나저나 코지마의 아버지인 프란츠 리스트는 딸이 바그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지 코지마와 의절하였으며 코지마도 그런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바그너와 코지마는 정식으로 결혼하고 부부가 되었지만 바그너는 그 후에도 예쁜 여자만 눈에 보이면 사정없이 친하게 지낸 일이 한두번 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코지마의 은근한 압박으로 드러내놓고 바람을 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69세라는 노년에 20대 중반의 캐리 프링글을 만나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다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인 1883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그너의 간단한 여성편력이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함께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여러가지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였습니다. 바그너와 함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창설한 것입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이후 20여년 동안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주관하였습니다. 코지마는 바이로이트의 레퍼토리를 바그너의 10개 오페라로 구성된 이른바 '바이로이트 캐논'(Beyreuth Canon)으로 확대하였습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세계적인 행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오로지 코지마 바그너의 헌신적인 기여 때문이었습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후기 작품들, 특히 '파르지팔'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코지마는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후 바그너의 음악과 철학을 증진하는 일에 여생을 헌신했습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3두 딸 이외에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바그너의 뒤를 이어 작곡가가 된 지그프리트 바그너입니다. 아무튼 코지마의 생애도 바그너 이상으로 파란만장하고 영광과 오욕이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인 코지마

 

포레, 엠마 바르다크와도 열정적인 관계

가브리엘 포레(1845-1924)는 프랑스의 20세기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파반느와 진혼곡은 깊은 감동을 주는 대표작입니다. 포레는 뛰어난 오르가니스트 겸 피아니스트였고 또한 파리음악원의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여성편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부인과 평생 이혼을 하지 않고 살았지만 그런 중에도 여러 여인들과 스캔들을 가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엠마 바르다크와의 러브 어페어였으며 또한 그의 열렬한 팬인 위나레터 드 세이 몽베야르 부인과의 염문입니다. 포레는 38세 때에 11년 연하의 마리 프레미에(Marie Fremiet: 1856-1926)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마리는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각가인 엠마뉘엘 프레미에의 딸로서 마리 자신도 상당한 재능의 화가였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누가 보더라고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까지 두었습니다.

 

포레와 마리

 

그러다가 포레는 잠자고 있던 연애감정이 솟아났던지 마리와 결혼한지 몇 년후에 엠마 바르다크(Emma Bardac: 1862-1934)와 뜨거운 관계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엠마는 재능있는 소프라노였습니다. 엠마는 17세 때에 파리의 은행가인 지기스몽 바르다크와 결혼해서 두 아들까지 두었다가 이혼한 여인입니다. 엠마는 미모이기도 했지만 사교성이 높아서 파리의 사교계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런 엠마를 만난 포레는 그로부터 두 사람은 몇 년 동안 세상이 다 아는 밀회를 하며 사랑의 감정을 키웠습니다. 그러자 포레의 부인인 마리는 남편 포레와 엠마와의 불륜을 참지 못하여 질투심에 권총 자살까지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역시 엠마는 엠마인지로 어느날 그의 아들 라울이 자기의 음악 스승인 드빗시를 엠마에게 소개하였고 두 사람은 뜨거운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엠마는 포레 부인의 사건도 있고 해서 결국은 포레에게서 멀어지고 드빗시와 밀월여행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드빗시도 결혼해서 부인이 있는 입장이었습니다. 드빗시는 엠마와의 비밀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인 로잘리 릴리(Rosalie Lily)에게 결별을 통보하고 엠마와 결혼했습니다. 아무튼 이로써 포레와 엠마와의 뜨거웠던 관계는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사족이지만 저 유명한 엠마 바르다크는 포레와 드빗시와는 별도로 조르즈 비네와도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포레는 엠마를 위해 La bonne chanson을 작곡해서 헌정했고 엠마의 딸로서 Dolly라는 애칭의 Helene을 위해서도 피아노 듀엣을 위한 Dolly Suite를 작곡해서 헌정했습니다. 혹자는 Dolly의 아버지가 포레라는 주장을 했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어서 흐지브지 되었습니다. 포레가 엠마와 돌리에게 그만큼 애정을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드빗시와 결혼한 엠마 바르다크

 

그건 그렇고 포레는 1920년에 파리음악원 교수에서 은퇴하였습니다. 그 때 그는 이미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고 게다가 평소에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폐에 이상이 생겼으며 아울러 몸이 극도로 쇠약해 있었습니다. 포레의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위나레타 드 세이 몽베야르(Winnaretta de Scey-Montbellard) 부인이 포레를 딱하게 여겨서인지 사랑해서인지 아무튼 포레에게는 밝은 태양 아래에서의 요양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베니스의 대운하에 있는 자기의 저택으로 데려갔습니다. 포레는 이곳에서 상당기간 머물면서 어느정도 기력을 되찾았습니다. 포레는 위나레타를 위해 다섯 개의 Melodies de Venice를 작곡하여 헌정했습니다. 얼마후 파리에 돌아온 포레는 192479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포레의 장례식은 거의 국장 수준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부인 마리는 그로부터 2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