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위대한 작곡가들의 여인 열전-2

정준극 2022. 9. 2. 21:14

열렬하게 사랑했던 해리엣과 이혼한 베를리오즈

19세기에 런던이나 파리를 막론하고 해리엣 스미슨(Harriet Smithson: 1800-1854)을 모르는 사람을 없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해리엣은 뛰어난 미모의 연극배우였습니다. 연기력도 대단했습니다. 해리엣은 특히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오펠리아 역할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1803-1869)가 파리에서 해리엣의 오펠리아를 보고 한 눈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에 완전 매료되어 저 유명한 환상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을 작곡할 정도였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에게 끈질기게 구혼하였으나 해리엣은 내키지 않아 했습니다. 급기야 베를리오즈는 자살극까지 꾸몄고 이에 굴복한 해리엣은 베를리오즈와 결혼하였습니다. 베를리오즈와 해리엣의 결혼은 세기의 화제였습니다. 그런데 실상 열정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여러 러브 스캔들로 유명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해리엣과의 결혼생활 중에도 끊임없이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그중에서도 평범한 소프라노인 마리 레시오(Marie Recio: 1814-1862)와의 관계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이었습니다. 마리 레시오의 아버지는 프랑스군 대령이었습니다.

 

마리 레시오와 베를리오즈는 1844년부터 특별한 관계가 되었고 그 후로 마리는 베를리오즈와 연주여행을 함께 하며 마치 배우자처럼 행동했습니다. 베를리오즈는 그의 걸작인 Les Nuits d’ete(여름 밤)Absence를 마리를 위해 작곡했습니다. 마리는 여름 밤의 노래들을 콘서트에서 자주 불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부터 마리는 아예 베를리오즈와 동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를리오즈와 해리엣은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그 즈음에 해리엣은 연극배우로서 더 이상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해리엣은 알콜 중독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건강이 극히 악화되었습니다. 더구나 질투심도 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해리엣은 1854년에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를리오즈는 기왕에 사정이 그렇게 되자 해리엣이 세상 떠난지 얼마 후에 마리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마리도 결혼생활 8년 만에 병마와의 싸움에 져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첫 부인인 해리엣 스미슨

 

베를리오즈의 두 번째 부인인 마리 레시오

 

 

제니 린드를 사랑했던 멘델스존

펠릭스 멘델스존(1809-1847)이라고 하면 행복한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엇 하나 아쉬움 없이 자랐고 음악활동을 위해서도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멘델스존은 당대에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음악가였습니다. 부인은 아름답고 지성적인 여인이었고 슬하에는 다섯 자녀까지 두었습니다. 그런 멘델스존인데 부인을 두고 다른 여인을 깊이 사모한 일이 있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소프라노 제니 린드였습니다. 제니 린드와의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부인 세실 장르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어느 때 멘델스존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음악제를 지휘하기 위해 갔었습니다. 그 때 친구의 소개로 프랑스 개혁교회 성직자의 딸인 어여쁘고 재능 있는 세실 장르노(Cecile Jeanrenaud: 1817-1853)를 만났습니다. 장르노도 실은 음악제 합창단의 멤버였습니다. 멘델스존은 단번에 장르노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멘델스존은 이어 뒤셀도르프 음악제에 갔었지만 온통 장르노 생각뿐이어서 음악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장르노에게 청혼하여 드디어 1837, 그가 28세 때에 20세의 장르노와 결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누가 보더라도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아이만은 질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나머지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거나 훌륭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르노는 질병으로 한창 나이인 36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는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였습니다. 멘델스존은 독일에서 제니 린드와 연주회를 함께 한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어느새 제니 린드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인인 장르노가 살아 있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멘델스존이 더 할수 없는 애처가이며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 그 자체라고 말했지만 멘델스존의 마음속에는 제니 린드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멘델스존은 제니 린드에게 여러번 러브 레터를 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멘델스존의 사후 제니 린드의 집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편지에는 만일 자기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함께 있지 못하게 된다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니는 멘델스존의 부인이 엄연히 생존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의 이목을 두려워하여 멘델스존의 협박적 간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니 린드도 멘델스존을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니 린드가 주도하여서 멘델스존의 사후인 1849년에 멘델스존장학재단을 설립했고 몇년 후에는 함부르크의 멘델스존 생가에 기념비를 세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멘델스존장학재단의 제1회 장학생은 당시 14세의 아서 설리반이었습니다. 아서 설리반은 나중에 사보이 오페라를 만들어 낸 영국 최고의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맨댈스존의 부인 세실 장르노
멘델스존과 사랑의감정을 키웠던 제니 린드

 

조르즈 상드와 복잡한 관계였던 쇼팽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류 중의 여류인 조르즈 상드(1804-1876)와 뛰어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프레데릭 쇼팽(1810-1849)의 러브 스토리는 당대 최대의 로맨스였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친구로 시작해서 연인이 되어서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요? 상드와 쇼팽의 관계는 생각 외로 복잡한 것이었고 또한 비정상적인 면이 있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한 부부 사이도 아니었고 다만 한 때의 열정을 이기지 못한 피상적인 연인일 뿐이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를지도 모릅니다. 우선 조르즈 상드가 어떤 여인인지 알아두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조르즈 상드는 필명이며 원래 이름은 아망틴 루실 오로르 뒤팽(Amantine-Lucile-Aurore Dupin)이었습니다. 파리 토박이입니다. 상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였습니다. 상드는 프랑스보다 영국에서 빅토르 위고 또는 오노레 드 발자크보다 더 인기가 높았습니다. 사람들을 상드를 유럽 낭만시대 최고의 작가라고 찬사를 보냈습니다.

 

상드는 182218세 때에 어느 귀족의 사생아인 캬시미르 뒤드방이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상드는 미모와 재능으로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상드는 유부녀이면서도 1825년부터 젊은 변호사인 오를리앙 드 세지라는 사람과 열정적인 사랑을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이성적이 아닌 플라토닉 러브였다고 했습니다. 상드는 타고난 보이 헌팅의 재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상드는 얼마후 이른바 자신만의 로맨틱 레벨리온(Romantic Rebellion)에 돌입했습니다. 말하자면 결혼한 여인이지만 연애는 자유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결혼 12년 만에 남편과 법적으로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상드의 좋게 말해서 로망스, 나쁘게 말해서 스캔들은 화려할 정도로 전개되었습니다.. 상드는 소설가 쥘르 상도, 작가 프로스페 메리메, 극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 배우 피에르 프랑수아 보카즈, 작가 샤를르 디들러, 소설가 펠리시 마예피유, 정치인 루이 블랑크, 그리고 마침내 위대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쇼팽과 로맨틱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상드와 쇼팽은 1938년 겨울에 스페인령 마요르카 섬에 가서 몇 달을 지냈습니다. 쇼팽은 그때 이미 결핵으로 고통 중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마요르카의 겨울은 습하고 추운 날씨여서 쇼팽의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상드는 그의 소설 루크레지아 플로리안’(Lucrezia Florian)에서 쇼팽을 소설의 주인공인 동유럽 어느 왕국의 병약한 공자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상드와 쇼팽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상드의 딸과 아들의 역할도 가세되었습니다. 상드는 결혼한 딸 솔랑즈의 생활비를 대주었으나 상드 자신도 경제적인 여유가 없게 되지 지원을 끊었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솔랑즈에게 관대하고 친절했던 쇼팽이 생활비의 일부를 대신 지원해 주었습니다. 상드는 쇼팽이 솔랑즈에게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질투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상드의 아들 모리스의 역할도 컸습니다. 모리스는 쇼팽이 잠시 파리에 있는 상드의 저택에 들어와서 지내자 혹시나 재산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여 쇼팽을 라이발처럼 여기고 힘들게 했습니다. 결국 상드는 쇼팽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쇼팽과 결별했습니다. 상드는 심지어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세간에서 얘기하는 대로 쇼팽과 상드의 관계가 열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조르즈 상드

 

 

클라라도 사랑했던 브람스

브람스는 슈만의 작곡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처럼 청년 브람스는 14세나 연상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지극히 사모하였습니다, 클라라도 그런 브람스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한계를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튼 두 사람의 관계는 하도 유명하여서 사람들은 플라토닉 러브의 모델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감정은 어떠했고 실제로는 어떠했을 까요?

브람스는 슈만의 명성을 듣고 작곡을 배우기 위해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브람스의 20세의 청년이었을 때인 1853년 가을이었습니다. 슈만과 클라라는 브람스의 자기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듣고 곧바로 브람스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브람스는 슈만의 제자가 되었고 함부르크에서 뒤셀도르프로 거처까지 옮겼습니다.

 

브람스는 뒤셀도르프에 있으면서 슈만의 집을 자주 찾아가서 클라라를 도와주고 아이들과도 놀았습니다. 슈만과 클라라는 모두 여덟 자녀를 두었는데 브람스가 클라라를 만났을 때 클라라는 일곱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구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때 슈만은 아무래도 정신이 좀 이상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두 사람의 감정은 우정 이상으로 깊어갔습니다. 클라라는 브람스보다 14세 연상이었습니다. 1854227, 그러니까 슈만이 44세 때에 슈만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본(Bonn)에서 가까운 라인강의 어느 다리에서 강물로 뛰어 들어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마침 낮이어서 강에 있던 어부들이 슈만을 구조했습니다. 정신이 들은 슈만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슈만 가족은 본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 부근의 엔데니히(Endenich)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슈만의 자살기도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뒤셀도르프에서 단숨에 본으로 달려와 클라라를 위로하고 여섯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슈만은 정신병원에서 2년 후인 1856년에 4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람스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클라라와 아이들을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때로는 이들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브람스는 클라라와 아이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얼마후 클라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로 잠시 휴양을 가기로 했습니다. 브람스도 동행했습니다. 이들은 두어달 동안 스위스에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서로를 위해 헤어지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로 떠났고 브람스는 비엔나로 갔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1896년에 브람스는 비엔나에서 클라라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브람스의 상심은 말 할수 없어 컸습니다. 브람스의 건강도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도 못된 11개월 후인 1897, 브람스는 클라라를 따라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브람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두어 달 동안 베이스와 피아노를 위한 The Four Serious Songs(Op 121)를 작곡하느라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아마도 클라라를 생각해서였을 것입니다. 네 노래 중에서 세 노래는 죽음과 환생을 다룬 것이지만 마지막 노래는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자선)에 대한 것입니다. 브람스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고 클라라도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에 재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분명히 서로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이성적인 사랑을 염두에 둔 것인지, 또는 우정에서 출발한 평범한 사랑인지는 두 사람만이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이 지극히 순수했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만은 숨길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클라라의 일기와 브람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클라라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영어로 번역한 것을 소개합니다. 번역은 독자 각자의 몫입니다. ‘There is the most complete accord between us...It is not his youth that attracts me...No, it is the fresh mind, the gloriously gifted nature, the noble heart, that I love in him.’

한편 브람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I believe thath I do not have more concern for and admiration for her than I love her and find love in her.’

 

독일 정부 발행의 클라라 슈만 기념 화폐

 

리스트와 내연관계의 마리 다구 백작부인

헝가리 출신의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여성이면 누구나 흠모하는 뛰어난 용모였습니다. 리스트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년에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으로서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1876)와는 10년이나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며 세명의 자녀까지 두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리스트와 마리 다구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가 나중에 저 유명한 바그너와 결혼한 코지마 한 사람뿐인 줄 알지만 실은 12녀를 두었습니다. 그런 마리 다구가 리스트를 처음 보고 키는 크지만 가냘프게까지 보이는 마른 체구, 얼굴은 창백한 듯 했으나 커다란 눈은 바다 빛과 같은 푸른 색, 그리고 눈빛은 마치 파도가 햇빛을 잡으려는 듯 반짝이는 섬광 같았다라고 적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의 진정한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마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저 그런 프랑스 귀족 가문으로 사정상 독일로 이주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의 원래 이름은 마리 캬트리느 소피 드 플라비니(Marie Catherine Sophie de Flavigny)였습니다. 마리는 뛰어난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으며 사교적인 지성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낭만주의 작가 겸 역사학자로서 이름을 떨쳤습니다. 마리는 22세 때에 프랑스 귀족인 샤를르 다구(Charles d’Agoult)백작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백작부인(Comtesse d’Agoult)의 호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마리는 남편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었습니다. 마리는 결혼한지 몇 넌 후인 20대 말에 우연히 리스트를 만났습니다. 당시 리스트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마리는 리스트의 주위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중에는 쇼팽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쇼팽은 마리를 위해 연습곡(에뛰드) 12(Op 25)을 헌정했습니다. 쇼팽은 그 전에 리스트에게 연습곡 10곡을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리스트는 초기작품 중의 하나인 하이네 시에 의한 Die Lorelei를 마리에게 헌정했습니다.

 

마리와 리스트는 1835, 즉 마리가 30세이고 리스트가 24세 때부터 4년간 동거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 스위스 등에서 순회연주가 있을 때에 동행했습니다. 마리는 리스트와 동거하다가 불현 듯 가정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거의 6년 동안 리스트와 밀회하면서 지냈습니다. 말이 밀회이지 실은 온 동리 사람들이 다 아는 관계로 지냈습니다. 마리는 리스트와의 사이에서 세 자녀를 두었습니다. 첫째가 블랑딘(Blandine)으로 훗날 프랑스 총리가 된 에밀 올리비에르의 결혼했으나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 딸이 저 유명한 코지마(Cosima)입니다. 코지마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유명한 한스 폰 뷜로우와 결혼했으나 리하르트 바그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동거에 들어갔고 훗날 폰 뷜로우가 이혼을 허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그너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셋째가 아들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뛰어난 재능의 피아니스트였지만 20세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리는 리스트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리스트도 한창 나이에 마리와의 관계가 소원해 졌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 다구 백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