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금순아' -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전
2010. 6. 23 - 8. 23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굳세어라 금순아' 특별전시회장 안내표지판. 어떤 소녀가 전시장 안내 간판 앞을 휘딱 지나가고 있다. 금순이 만한 나이의 소녀이다.
김일성 도당이 일으킨 6.2 사변을 경험한 세대로서 금순이가 누군지 모른다면 말이 안되는 일이다. 금순이는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연합군과 국군이 후퇴를 하게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흥남철수가 이루어 질때 오빠와 함께 흥남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하는 배를 타고 피난길에 오르려 했으나 너무나 많은 피난민들 때문에 부두에서 서로 헤어져서 끝내 생사를 알수 없게 되었다는 불쌍한 소녀의 이름이다. 그 때 미군은 한 사람의 피난민이라도 더 태우려고 선박에 실려 있던 군수물자까지 바다에 버렸다고 하지만 과연 금순이도 요행으로 그 배를 탔는지는 알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흥남철수 때에 금순이의 오빠는 천신만고 끝에 배를 타고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올수 있었으나 동생 금순이는 과연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부산에 온 오빠는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름과 나이는 모르지만 아마 스므살까지는 되지 않은 10대 후반의 청소년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20세 전후의 청년이라고 하면 당연히 군에 입대하여 북한 공산군을 무찌르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여동생 금순이는 나이가 열댓살 정도라고 보면 될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금순이 남매는 일찌기 조실부모하고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다가 공산당 치하에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어서 늙은 할머니는 어쩔수 없이 고향에 계시도록 하고 남매만 피난길에 나섰다고 한다. 금순이의 원래 고향이 흥남인지 또는 함경도 어디인지는 알져진바 없다. 그러면 혹시 몇년전 어떤 TV 가 내보낸 일일연속극 '굳세어라 금순아'에서의 금순이가 바로 그 금순이를 말하는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들것이다. 미안하지만 일일연속극의 금순이는 흥남부두에서 오빠와 헤어진 그 금순이의 얘기가 아니다. 아무튼 TV 일일연속극 '굳세어라 금순아'에서는 금순이의 풀네임이 나금순이라고 소개되었다.
1950년 흥남철수 당시의 흥남부두에 모여 피난배를 타려는 피난민들과 장병들. 이러니 이 와중에 식구들과 헤어질수 밖에 없을것 같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타이틀로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실은 6월 23일에 오픈하여 8월 23일까지 열린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전시회라면 길을 물어서라도 찾아가서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중의 하나에 속하는지라 이번에도 부지런히 가서 보았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별의 별 것이 다 전시되어 있어서 60년전 사변당시의 생각을 저절로 갖게 해주는 전시회였다. 철모를 이용하여 만든 똥푸는 바가지까지 전시되어 있으니 할 말 다했다. 전시회의 타이틀은 '굳세어라 금순아'이지만 실제로 전시회는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중에서 두번째 파트가 '굳세어라 금순이'라는 내용이다. 두번째 파트는 사변 중의 한심하고 처량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로 나머지 파트들을 소개하자면 1부는 전쟁이라는 제목으로서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는 내용이며 3부는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서 사변 이후의 새로운 삶을 일구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한 것이다. 그리고 4부는 '내가 겪은 6.25 전쟁'이라는 제목으로서 주로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의 사연들이 일부나마 전시되어 있고 여기에 사변과 관련된 추억의 물건들이 사연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그런 물건들은 대체로 개인소장품들인데 이번 전시회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내놓은 것들이라고 한다. 이렇듯 전시회는 4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노래가 온 국민들, 특히 이산가족의 단장을 가장 애끓게 만드는 것이기에 전체 제목을 그 노래 제목으로 삼았던 모양이다.
전시장의 금순이 3D 영상물. 가운데 소녀가 금순이로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우리 오빠 좀 찾아 주셔요'라고 부탁하고 있다. 금순이는 다른 피난아줌마들과 함께 남의 빨래를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특별전시회 소개는 잠시 뒤로 미루고 다시 '굳세어라 금순아'의 얘기로 돌아가면, 흥남부두에서 오빠와 헤어진 금순이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 버전이 있지만 금번 특별전시회의 영상물에 의하면 금순이도 역시 고생끝에 부산까지 내려왔으며 산비탈의 어떤 하꼬방에 살게 되었는데 남의 빨래를 해주는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어린 마음에 오빠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오빠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영상물의 금순이가 '내레...'라면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흥남 출신이 아니라 평안도 출신이란 말인가? 그건 그렇고 만일 금순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아마 70대 중반을 훨씬 넘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부산에 그대로 눌러 살고 있는지, 또는 환도할 때에 서울로 올라온 후에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지는 모른다. 결혼을 했겠지. 그렇다면 어느덧 손주들도 두었을텐데...하여튼 60년 전의 일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인기 작곡가 박시춘씨가 곡을 붙이고 그의 친구 김사랑씨가 가사를 붙인 노래로서 '신라의 달밤'으로 유명한 현인씨가 노래를 불렀다. 그야말로 구구절절이 민족적 비극을 대변하는 노래가 아닐수 없다. 아시는 분들은 다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혹시라도 '금순이가 도대체 누구야?'라고 묻는 청소년이 있다면 이 기회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를 알려주어 금순이가 누구인지를 소개코자 한다. 3절까지 있지만 편의상 2절까지만 소개코자한다. 3절은 나중에 반갑게 만나자는 내용일뿐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이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시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히 떴다.
사변후 국민들의 전쟁에 대한 참상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제작되어 나온 영화들. '전우가 남긴 한마디' '종군수첩' '울지 않으리' '수병과 제독' 등이다. 이런 영화를 만들면 정부에서도 상당한 지원을 해 주었다. 정부로서는 국민들의 반공사상을 고취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청소년들이 상당히 있다는 신문보도를 읽은 일이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직도 북한 인민군과 휴전상태에 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안보의식을 철저히 가져야 할 것이다. 며칠전의 보도에 따르면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대한민국의 은인 맥아더 장군의 기념상을 때려 부수자고 난리를 쳤던 무리들이 다름아니라 북한의 공작후원을 받아서 그랬다고 한다.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서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전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북한공산당 때문에 우리가 말로 형언할수 없는 고난을 얼마나 많이 당하였는지, 우리의 우방들이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내용에 대하여는 세세하기 설명할 길이 없으므로 직접 가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본란에서는 생략코자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입장은 무료이다.
육본에서 만든 입영관련 포스터.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나라 위해 바친 몸 용감히 싸우겠습니다. 순복아! 아빠 엄마 잘 모셔라. 바둑아! 집 잘 지켜라. 오냐 어서 다녀 오렴'이라고 써있다. 요즘 군대 가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이 포스터가 어떻게 비칠까? 그나저나 입영병인 김영길군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 계시다는 말인가? 밭일 하러 나가셨나? 아니면, 6.25 때 전선으로 달려가 공산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시었나? 하지만 '순복아, 아빠 엄마 잘 모셔라!'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니 두 분 모두 살아계시는데 짐작컨대 병마와 싸우고 계시든지 아니면 밭일 하러 나가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는 초등학교(국민학교) 교과서로서 이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 '애국생활' '반공생활' '전시생활 - 우리도 싸운다' 등등. 학교에서 '반공생활' 시간에는 주로 일선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를 썼다. 년말이면 대체로 위문품을 걷었다. 먹고 살기도 어려운 가정에서는 그나마 위문품 가져오라는 숙제도 고통이었다. 위문품으로는 주로 양말, 치약, 비누 등이었다. 군대에서 주는 비누는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빠지는 탈모비누였기 때문에 그나마 민간비누가 요긴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선장병들에게는 고사리 손으로 쓴 위문편지가 제일 반가웠을 것이다.
공보처에서 발행한 6.25사변 제3주년행사자료에 나와 있는 '통일 행진곡'이다. 지금 65세 이상 되시는 분들은 학교에서 이 노래를 많이들 불렀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공산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라는 가사이다. '동포여..'라는 대목에서는 목청을 아주 높여야 했는데 어느덧 '똥 퍼요'라는 말로 와전되어 유행되었다. 하기야 수세식 화장실에 없던 당시에는 집집마다 변소를 치는 문제는 아주 큰 문제였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벌기 위해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똥 퍼요'라고 소리치며 변소치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록 허드슨 주연의 '전송가' 영화 포스터. 한국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딘 헤스 대령의 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단 헤스 대령은 미국에서 목사였으나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공군조종사로 자원입대하였다. 전반부의 항공촬영과 공중전 씬이 좋고 후반부는 휴머니티가 넘치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6.25 사변 당시 고아가 되었던 아동 25명이 특별출연하였다. 이런 영화가 들어오면 학교에서는 거의 무조건 단체로 관람하였다. 물론 입장료는 각자 부담이었다. 가난하고 없는 집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구경을 가는 날에는 일부러 아프다고 하며 결석하였다.
1950년 6월 26일자 샌프란시스코 신문보도. '공산군이 서울의 문턱에'라는 제하에 한국의 취프(대통령)가 미국에 대하여 '원조가 너무 적고 너무 늦다'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마릴린 몬로가 미군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1954년에 한국을 방문했다. 이를 기념하여 접시를 만들었다. 이 접시를 가지고 있으면 대단한 자랑이었다. 당시 정서로서는 마릴린 몬로의 모습이 너무나 선정적이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부대에 줄이 있는 사람들은 이 접시를 몰래 구해 가지고 보면서 좋아했다. 왼쪽 끝에는 종군기자 중에서 유일한 여기자인 미국의 마가레트 히긴스가 쓴 '한국전쟁'이라는 책이다. 히긴스 기자는 얼마후 월남전을 취재하던중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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