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18구 배링

[참고자료] 전설적인 무용가 홰니 엘쓸러

정준극 2010. 8. 31. 15:03

전설적인 무용가

홰니 엘쓸러(Fanny Elssler)

 

전설적인 무용가인 홰니 엘쓸러

 

배링구의 겐츠가쎄(Gentzgasse)는  프리드리히 폰 겐츠를 기념하는 거리이다. 겐츠는 전설적인 무용가 홰니 엘쓸러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지니며 홰니 엘쓸러를 후원한 인물이다. 겐츠는 당대의 재상 메테르니히의 비서로서 당시 정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홰니 엘쓸러는 어떤 여인인가? 홰니 엘쓸러는 1810년 비엔나의 굼펜도르프에서 태어났다. 홰니 엘쓸러는 19세기 오스트리아를 풍미한 전설적인 무용가였다. 아마 홰니 엘쓸러 이전의 전설적인 무용가로서는 마리아 탈리오니(Maria Taglioni)가 유일할 것이다.

 

홰니 엘쓸러가 태어난 굼펜도르프 마을의 아멜링슐로쓰. 1895년

 

홰니 엘쓸러의 아버지는 요셉 하이든의 악보사보가였다. 어릴때부터 댄스의 재능을 보였던 홰니는 비엔나 궁정극장(Hoftheater)가 운영하는 발레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홰니가 무용가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비엔나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나폴리였다. 1824년, 홰니가 14세 때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춤을 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를 계기로 홰니는 나폴리-시실리 왕국의 레오폴드, 그의 아들인 나폴리의 페르디난트4세 등 왕족들과 친분을 쌓으며 지내게 되었다. 홰니는 19세 때인 1829년 당시 46세인 프리드리히 폰 겐츠를 만났다. 겐츠는 메테르니히 재상의 비서였다. 그로부터 1832년 겐츠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 사람은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두 사람은 배링에 있는 겐츠의 별장저택에서 함께 지냈다.

 

 홰니 엘쓸러의 후원자인 프리디르히 폰 겐츠

 

겐츠는 홰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여 할수 있는 대로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겐츠는 홰니가 비엔나 상류사회에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될수 있도록 물심양면의 지원을 했다. 심지어는 상류사회에 어울릴수 있는 교양을 갖추기 위해 관계되는 책을 사다 주었으며 영향력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홰니는 겐츠에게 무한한 존경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1830년대에 들어서서 메테르니히 재상이 실각하자 겐츠의 정치적인 경력도 마감을 하게 되었다. 이때로부터 겐츠는 홰니와 함께 봐인하우스(현재의 배링 지역)에 있는 저택으로 들어와 살았다. 겐츠는 1932년 6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춤추는 홰니 엘쓸러

 

홰니는 1830년대부터 베르린,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심지어는 러시아와 저 멀리 쿠바, 북미주까지 여행하였다. 홰니는 카추차(Cachucha: 혼자서 추는 스페인 춤) 춤에 뛰어났다. 이와 함께 폴카와 같은 민속춤에도 놀랄만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홰니는 1884년 11월 27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홰니는 히칭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히칭구의 엘쓸러가세(Elsslergasse)는 홰니 엘쓸러를 기념하여 1894년에 붙인 거리이름이다. 아이젠슈타트에는 홰니 엘쓸러가쎄(Fanny-Elsslergasse)가 있다. 홰니는 어릴 때에 아버지와 함께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자주 방문했었고 오랫동안 머물기도 했다. 함부르크의 알러뫼에(Allermöhe)에 있는 거리는 홰니-엘쓸러-보겐(Fanny- Elssler-Bogen)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홰니의 함부르크 공연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홰니 엘쓸러가 묻혀 있는 히칭공동묘지의 십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