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
19세기를 주도한 소프라노
마담 칸디아공작부인(Madame the Duchess De Candia)으로 더 알려진 줄리아 그리시(Giulia Grisi)는 19세기에 세계에서 가장 주도적인 소프라노였다. 그리시는 1811년 밀라노에서 태어나 1869년 여행중에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시는 그리스왕가의 일원이었다. 그러한 그가 사르디니아 왕국의 왕자이며 후작의 작위를 갖고 있는 조반니 마테오 마리오와 결혼하였다. 테너 마리오라고 알려진 마리오 역시 위대한 성악가였다. 19세기에 유럽과 미국에서 그리시와 마테오의 이름을 모르면 행세를 하지 못할 정도로 두 사람은 오페라 무대에서 유명했다. 그리시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군대에 속한 이탈리아 장교였다. 그리시의 집안은 음악적으로 재능이 많았다. 그리시의 이모인 주세피나 그라씨니(Giuseppeina Grassini: 1773-1850)는 유럽에서 이름을 떨친 오페라 성악가였다. 그리시의 언니인 주디타도 성악가였고 사촌인 칼로타는 유명한 발레리나였다. 언니인 주디타 그리시는 벨리니의 오페라 '캬퓰레티가와 몬테키가'에서 바지역할인 로메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가족 중에서 예술에 관련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줄리아 그리시도 어릴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리시가 소프라노로서 처음 오페라에 데뷔한 것은 1828년, 불과 17세 때에 볼로냐에서 공연된 로시니의 젤미라(Zelmira)에서 엠마를 맡은 것이었다.
1844년. '노르마'의 타이틀 롤을 맡은 줄리아 그리시
로시니와 벨리니는 모두 줄이아 그리시의 재능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특히 벨리니가 그러했다. 그리하여 그리시는 1831년 12월 26일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벨리니의 '노르마'에서 아달지사(Adalgisa)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하였다. 그때 타이틀 롤인 노르마는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유명한 주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가 맡았었다. 그리시는 나중에 노르마 역할도 자주 맡았었다. 그리시는 1832년 파리에서 로시니의 '세미라미데'에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1834년에는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의 런던 공연에서 니테타를 맡아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35년에는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에서 벨리니의 '청교도'가 초연되었을 때 주역인 엘비라의 이미지를 창조하여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엘비라를 맡았을 때 그리시는 24세였다. 1842년에 도니체티는 그리시와 테너 마리오를 위해 '돈 파스쿠알레'를 작곡하였다. 그리시는 노리나를 맡았고 마리오는 에르네스토를 맡아 인기를 차지했다. 그후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청교도'에서 루이지 블랑셰와 함께
그리시의 음성은 그가 정상에 있을 때에 드라마틱 소프라노라고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리릭으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평론가들은 그리시의 음성을 예외적으로 아름답고 흔들림이 없이 일정하여 부드럽다고 말했다.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드라마틱 소프라노에서 자주 볼수 있는 음정의 샤프를 말한다. 그러한 재능으로 그리시는 거의 30년에 걸쳐 유럽과 미국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하였다. 그리시는 뛰어난 연기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시가 출연하는 오페라는 언제나 대성황이었다. 그리시에 대한 인기는 다른 곳보다도 런던에서 대단했다. 그리시는 런던에서 당대의 루이지 라블랑셰, 조반니 루비니, 안토니오 탐부리니 등과 함께 오페라 무대에 섰었다. 물론 테너 마리오와도 자주 공연하였다. 아마도 그리시와 마리오로 인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런던 진출이 더욱 활발해졌을 것이다. 1854년에 그리시와 마리오는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가는 곳마다 귀빈대접을 받았다.
돈나 안나를 맡은 줄리아 그리시
그리시는 1836년에 멜시의 제라르백작이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 얼마후 그리시는 이혼하고자 했으나 제라르백작은 이를 거절했다. 몇년후 그리시는 마리오와 결혼하여 딸만 여섯을 두었다. 그리시와 마리오는 결혼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플로렌스의 빌라 살비아티(Villa Salviati)에서 지냈다. 마리오가 1849년에 산 저택이었다. 그리시는 플로렌스에서 지내면서 여러 귀족들과 예술가들과 접촉하면서 지냈다. 그리스는 그리스 왕족이었으므로 그의 저택에는 러시아, 영국, 그리스의 왕족들도 찾아 왔었다. 그리시는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의 생페터스부르크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독일과의 국경지대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부상당한 그리시는 베를린의 호텔로 이송되었다. 결국 그리시는 베를린의 호텔에서 유명한 여의사 이사벨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났다. 1869년 11월 29일이었다. 남편인 마리오가 와서 그리시의 시신을 파리로 옮겼다. 그리시는 파리의 페레 사셰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몰리에르의 묘지 바로 앞이다. 나중에 마리오도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합장되었다. 그리시의 묘비에는 Marquise Juliette de Candia 라고 적혀 있다. 마리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 중에서 세실리아 마리아 드 칸디아는 저명한 작가가 되었다. 세실리아는 어머니인 줄리아 그리시를 추모하여서 The Romance of a Great Singer 라는 자서전적인 책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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