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 [‘캔터베리 이야기’에도 등장]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은 실로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소재가 되었다. 조프리 초서(Geoffrey Chaucer)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의 한 부분인 ‘용서하는 사람의 이야기’(The Pardoner's Tale)에 ‘방랑하는 유태인.. 오스트리아와 유태인/방랑하는 유태인 2009.11.21
아리마대의 요셉? '방랑하는 유태인'은 아리마대의 요셉? 십자가의 길. 라파엘 작품 또 다른 전설이 있다. 1228년에 웬도버의 로저(Roger of Wendover)라는 사람이 쓴 Flores Historiarum(영국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꽃'이라는 타이틀의 저서)에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이 나온다. 얘기의 발단은 이러하다. 어.. 오스트리아와 유태인/방랑하는 유태인 2009.11.21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 방랑하는 유태인 -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 The Wandering Jew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작품 '방랑하는 유태인'.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한 유태인이라고 한다. 직업은 로마총독 빌라도 저택의 문지기라는 설이 있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The Fly.. 오스트리아와 유태인/방랑하는 유태인 2009.11.21
또 다른 희생자들 [또 다른 희생자들] 나치는 유태인들과 집시들 뿐만 아니라 정신질환자, 신체불구자, 동성연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도, 프리메이슨 멤버, 그리고 정치범들과 공산주의자들도 모두 제거키로 한다.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을 처치하는 것은 정말 반인류적 행위가 아닐..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비유태인 희생자 [비유태인 희생자] 나치는 유태인들만 박해한 것이 아니다. 비유태인도 박해하였다. 여기에는 슬라브인, 폴란드인, 유고슬라비아인, 동부 슬라브족, 소련 전쟁포로 들이 포함된다. 나치는 이들도 인종청소의 대상으로 삼았다. - 슬라브족: 히틀러는 슬라브족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유태인 희생자 6백만명 [유태인 희생자] 라울 힐버그가 그의 저서인 ‘유럽 유태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에서 유태인 희생자가 5백10만명이라고 주장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1백40만명이 공공연하게 총살당했으며 2백90만명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되었고 80만명이 게토에서 지내다가 죽었거나 또..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희생자 2천만명 [희생자 통계]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희생자, 즉 사망자의 숫자가 달라질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유태인 희생자만을 말한다. 유럽에는 7백30만명의 유태인이 있었으며 그중 78%인 6백만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 넓은 의미에서는 22만-50만의 집시, 20만명의 신체불구자 ..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참담한 해방 [참담한 해방] 소련군이 말로만 듣던 강제수용소를 처음 발견했다. 폴란드의 마즈다네크(Majdanek)였다. 1944년 7월 23일이었다. 아우슈비츠는 1945년 1월 27일에 소련군이 점거하고 해방시켰다. 부헨발트(Buchenwald)는 1945년 4월 11일 미군이 해방했다. 버겐-벨젠(Bergen-Belsen)은 영국군이 4월 15일에 ..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죽음의 행진 [죽음의 행진] 1944년 중반에 들어와서 유태인에 대한 ‘최종해결’(Endlösung: Final Solution)은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였다.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강제수용소들에서는 거의 모든 유태인들을 가스실에서 처리하는 실적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만 목표치의 90%이상이 처리되..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
홀로코스트의 클라이맥스 [홀로코스트의 클라이맥스] 1942년 6월 홀로코스트의 책임자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프라하에서 암살당하였다. 에른스트 칼텐브룬너(Ernst Kaltenbrunner)가 뒤를 이었다. 아이히만의 동료였다. 아이히만과 칼텐부룬너는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최종해결’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1943년과 1944년.. 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2009.11.16